#문과생 #자소서 #암묵지 발굴하기
*이전 글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30대꼰대가 말하는 문과생의 자소서 https://brunch.co.kr/@linkyspark/23
앞선 글에서 문과생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은 대부분 '암묵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력서에 이를 기술하기 어렵고, 때문에 자소서에서 나의 잠재력을 가능한 많이 표현해낼 수 있어야 된다고 했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로 하기는 어려운 법, 비즈니스와 1도 관련 없어 보이는 나의 잠재력을 어떻게 회사와 연결시켜서 표현할 수 있을까?
살다 보면 어떤 것들은 그 시절에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나에게는 '내 전공인 심리학이 내 삶에 미친 영향'이 그 중 하나다.
나는 심리학 주전공, 경영학 복수전공을 했었다. 경영학 복수전공이 취업에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주전공 경영학인 사람에 비해서는 지원 분야가 제한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취업 과정에서 심리학이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 어렴풋이 짐작은 했으나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입사 3년차부터 생뚱맞게도 사업전략 업무를 맡게 되었다. 사업전략은 대부분 숫자와의 싸움이고 회계적인 지식이 많이 필요한 영역이다. 한마디로 심리학 베이스와는 맞지 않는 업무다. 하지만 다행히 초반 적응기를 좀 거치고 나서 부터는 안정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 심리학과에서 배운 '사고방식'이 꽤나 도움이 되었다.
현대 심리학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근거에 기반한 과학'을 목표로 한다. 최초의 심리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자들의 사유에서 시작되었지만, 현재는 인간의 행동과 정신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통계를 활용하고,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의거한 실험 등을 수행한다. 최근에는 뇌과학의 발달로 다양한 기술을 활용한 연구활동도 계속 하고 있다. 덕분에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모든 것을 근거에 기반해서 설명하고 명확히 기술하는 습관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낙천적인 사람들은 운전을 더 잘한다.'는 이론이 있다고 하자, 이를 이른바 '학계의 정설'로 인정 받으려면 넘어야 할 산이 한 두개가 아니다. 일단, '낙천적인 사람'의 기준은 무엇인가? 전 지구 인류 모두가 이 사람이 낙천적이라고 말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나라마다 다른 '낙천적'의 기준은? 아니면 어떤 심리검사에서 특정 척도가 몇 점 이상 나와야 낙천적인 것일까? 또한 운전을 잘한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사고를 안내면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몇 년간 무사고여야 운전을 잘하는 것일까? 이 때 외부적인 요인-예를 들면 다른 음주운전자가 와서 사고를 일으켰을 확률은? 낙천적이지 않은데 무사고인 사람들도 있을것인데, 몇% 비율 차이가 나야 진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열길 물속보다 어려운 한길 사람 속을 알기 위해 많은 근거와 분석이 필요한데, 이러한 과정은 사업전략 업무에도 그대로 적용 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 회사가 특정 사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쓴다고 가정해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해당 사업은 잠재력이 있는가? 현재 시장규모는 어떤가? 측정기준은? 앞으로의 예상 성장률은? 그러한 성장률을 예측한 근거는 무엇인가? 자사가 해당 사업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무엇인가? '성공한다’의 정의는 몇% 점유율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예상대는 재무적 수치는(매출,이익)?, 해당 수치를 추산한 근거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 투입은? 근거는?
이렇듯 표면적인 명시지(명문화할 수 있는 지식)의 개념에서 심리학과 사업전략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보이지만, 그 베이스가 되는 '사고방식'-즉, 암묵지(명문화 하기 어려운 경험/사고에 기반한 지식)의 영역으로 넘어간다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어떤 분야에 지원하고 싶지만 인턴십등 누가 봐도 확실하게 해당 분야와 연관되는 경험이 없다면, 자신의 경험 속에서 이런 암묵지를 이끌어내어 표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가 멘토링을 진행할 때는 전공이나 그 외 본인의 다양한 경험 등을 바탕으로 이 사람이 어떤 암묵지를 가지고 있는지 찾아내는데, 단순히 하나의 경험이 하나의 암묵지로 연결된다기보다는 그 사람의 일생에 걸친 여러 요소들이 연결되면서 하나의 조합으로서 결론이 나오고는 한다.
예를 들어 한 후배의 경우 지리학 관련 분야를 공부한 사람이었고, 이런저런 진로를 알아보다 인문계열 학생도 쉽게 지원할 수 있는 영업관리분야를 희망하고 있었다. 실제로 성격도 굉장히 좋은 편이고 성실한 편이어서 영업관리에 잘 맞을 사람이었으나, 본인이 4년간 배웠던 전공이나 이와 관련된 경험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오롯이 좋은 성격 - 좋은 영업사원의 측면에서만 자소서를 쓰다보니 약간 엣지가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지리학이라는 학문이 영업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 하려면 지리학을 통해 어떤 사고방식을 기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위키백과에서 지리학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지리학(地理學, geography)은 지표 상에서 일어나는 자연 및 인문 현상을 지역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과학의 한 분야이다. 공간 및 자연과 경제, 사회와의 관계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분야로, 공간이나 자연 환경이라고 하는 물리적 존재를 대상 안에 포함하는 점에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양면의 성격이 있다. 원래는 농경이나 전쟁, 통치를 위해 각지의 정보를 조사해 정리하기 위한 연구 영역으로서 성립했다. 그러나 현재는 자연과학 내지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서 지역마다 다른 공간적 이질성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게 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여기서 내가 보는 핵심 포인트는 ‘공간과 경제, 사회와의 관계를 분석한다.’는 부분이다. 사회적으로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 때 심리학과에서는 인간의 개인적 특성이나 사회역동적인 부분을 주로 분석한다면, 지리학을 공부한 사람은 공간의 특성, 그리고 이로 인해 파생된 내용들과 연관 지어서 해당 현상을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킬이 아니라 ‘사고방식’이다. 실제로 그런 분석을 하는 것은 대학원생 레벨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만, 학부생도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업직무의 관점에서 공간과의 상호작용은 어떤 것일까? 다양한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필자는 해당 후배와 가장 잘 맞는 포인트는 ‘상권 분석’ 이라고 생각했다. 공간의 특성 때문에 사람이 어떻게 모이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분석하고 이를 통해 비즈니스 성과를 극대화하는 것이 곧 상권분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그 후배는 로드샵 영업이 중요한 한 회사에 지원했고, 서글서글한 성격을 바탕으로 영업에서 업무를 배우고 향후 상권분석전문가로 성장하겠다는 흐름으로 자소서를 작성했다. 워낙 기본 베이스가 탄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략이 잘 먹혀 인턴을 거쳐 정규채용이 되었고, 지금도 그 회사에서 중견사원으로 훌륭히 성장하고 있다.
위의 심리학-사업전략 사례, 지리학-상권분석 사례 같은 방식으로 분석해내려면 선행되어야 하는 작업이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분석’ 두 번째는 ‘기업분석’이다. 자기분석은 단순히 내가 어떤 전공을 했고 무슨 경험을 했다는 나열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의 진정한 강점과 역량을 찾아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는 기업분석인데, 이 또한 단순히 해당 기업의 브랜드나 매출액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 회사의 심층적인 비즈니스 구조를 알고 그래서 그 기업이 어떤 직무에서 어떤 역량을 갖춘 사람을 원할지 추정할 수 있어야 한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이런 노력을 계속하다보면 어느순간 위에 기술한 암묵지를 활용한 자소서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분석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칼럼을 통해 설명할 예정이다.
사실 이런 식의 분석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긴 하다. 기계공학과를 전공했다면 그냥 기계를 잘 아니까 자동차를 잘 만들겠다고 하면 되고, 전자과를 전공했다면 반도체나 핸드폰 개발에 기여하겠다고 하면 될 일인데, 암묵지까지 분석해야 하니 문과생들은 정말 죽을 노릇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좋은 점을 굳이 하나 찾자면, ‘가능성’이 아닐까 한다. 같은 전공을 했어도 개인의 성향이나 경험에 따라 완전히 다른 암묵지를 개발하고 다른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문과생들이 누릴 수 있는 강점이라고 본다. 필자가 취업준비를 할 때도 보통 문과생들끼리 “어느 곳이든 지원할 수 있지만, 어느 곳에서도 안 받아준다.”고 푸념하고는 했는데, 어쨌든 어느 곳이든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니 그나마 위안이 되는 부분이 아닐까. 이 시간에도 집에서, 카페에서, 도서관에서 한줄기 희망을 보며 자소서를 쓰고 있을 모든 문과생들의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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