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즐리와 함께한 1년을 돌아보며
Magazine B를 읽으며 좋은 브랜드에 대해 공부하고, 회사 일을 하며 이런저런 브랜드들을 접하다 보면 가끔 무언가 애매하고 멀리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무래도 나라는 개인과는 꽤나 멀리 떨어진, 세계적인 브랜드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다 보니 무언가 탁상공론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생활 속에서 만나는 소소한 브랜드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돌아보니, 문득 매일매일 사용하지만 너무 자연스러워서 잊고 있었던 나의 One of 최애 브랜드가 생각났다. 바로 면도기와 쉐이빙 폼을 만드는 쉐이빙 브랜드 와이즐리다
내가 속고 있다고?
청소년기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면도를 했다.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면도를 한 번도 안 한 사람도 있다는데, 나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면도를 안 하면 내가 봐도 입과 코 주변이 덥수룩 해져서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면도 용품에 쓰는 돈도 꽤 많이 들어가는 편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면도날 비용이 만만치가 않아서, 주머니가 가볍던 대학생 시절부터 한 달에 몇만 원씩은 기본으로 들어갔었다. (엥겔 지수랑 비슷하게 Shave index 같은 것을 만들면 꽤나 비율이 높았을 거다)
그러던 중 페이스북에서 '당신은 속고 있습니다.'라는 도발적인 문구를 앞세운 와이즐리의 광고를 보게 되었다. 시중의 면도기 가격은 제조원가 대비 엄청나게 비싸고, 사실 그 비용은 모두 광고비/유통사 중간 마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 광고는 자신들이 독일의 공장들을 열심히 뒤져서 이런 부가 비용을 제외한 저렴한 가격에 면도기를 판매하고 있다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광고를 보고 나니 어렸을 적 나에게 면도를 처음 가르쳐준 면도 스승님(이라고 쓰고 아버지라고 읽는다)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생각났다. 대략적인 내용인즉, 면도기가 만들기 쉬워 보여도 상당한 수준의 금속가공기술이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해당 기술을 가진 글로벌 기업(질레트, 쉬크)등이 전 세계 면도기 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면도기 가격이 굉장히 비싸다는 것이었다. 유일한 국산 브랜드인 도루코도 과거에는 저렴했다고 하나 기술력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가는 만큼 가격도 세계 수준이 되었다.
면도기 회사의 손익 구조를 정확히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판촉비용이나 광고비용이 상당히 많이 드는 것 같아 보이기는 했다. 그렇게 돈을 들여서 일단 한 브랜드나 제품에 정착하게 되면 그 이후 리필 카트리지(면도날)를 계속해서 구매하게 되니 그런 것이겠지...(심지어 요새는 제조사들끼리 카트리지 호환도 안돼서 꼭 쓰던걸 사서 써야 한다)
이렇게 보면 합리적인 가격에 면도기를 공급한다는 와이즐리의 장점은 너무나 명확했지만, 실제로 와이즐리에서 첫 구매를 한 것은 약 두세 달이 더 지난 후였다. 그 이유는 페이스북 광고 상품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였는데, 첫째로 내가 페이스북 광고를 보고 샀다가 실패한 사례가 꽤 있었고 (지금도 서랍 한편을 고이 간직한 많은 물건들이 있다) 둘째로는 웃기게도 너무 저렴하다고 하니 오히려 신뢰를 하지 못한 이상한 심리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매번 마트에서 면도날을 찾는 것도 귀찮고 가격도 부담이 돼서 밑져야 본전으로 스타터 패키지를 주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지금 이런 글을 쓸 정도로 나는 와이즐리의 진성 팬이 되었다.
그 면도기가 나에게 좋은 브랜드인 이유
그래도 브랜드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니, 그냥 이게 최고야!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동안 공부한 좋은 브랜드들에 빗대어 와이즐리가 왜 좋은 브랜드인지 생각을 해보았다.
1. 일단 싸다. - IKEA
무조건 명품이고 최고의 퀄리티여야만 좋은 브랜드일까? 이런 생각을 바꾸어준 의미 있는 브랜드가 나에게는 IKEA 였다. 물론 한국 시장에서 생각보다 싸지 않다는 평가도 많지만, 기성 가구나 인테리어 제품들에 비하면 IKEA는 확실히 저렴한 가격이다. 그리고 그들의 가치인 '합리적인 가격'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이렇게 보면, 생활에 꼭 필요한 제품인 면도용품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해주는 와이즐리도 IKEA 만큼이나 좋은 철학을 가진 브랜드라는 생각이 든다. (기존에 비해 50% 이상 부담이 줄어들었다.)
2. 이것으로 충분하다 - MUJI
와이즐리 제품이 왜 좋을까를 생각해보니 MUJI의 슬로건 - "이것으로 충분하다" - 가 생각났다. 기존에 내가 사용하던 면도기들은 하나같이 유려한 곡선, 날렵한 커브, 반짝이는 메탈 바디 등을 가진 '때 빼고 광낸' 디자인 제품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신제품에 적용한 신기술들을 열심히 광고하고는 했다. 또, 기존의 면도기들은 화려한 메탈 바디를 가진 만큼 조금 시간이 지나면 낡고 더러워지고는 했다. 그래서 곧 새로운 바디를 사고 싶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면도를 지하철에서 하지 않고, 회사에서는 더더욱 하지 않는다. 즉, 남들 앞에 내가 면도하는 모습을 보일 일이 없고, 면도기 디자인이 샤넬이나 다이슨스러울 필요도 없다. 그저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면도날이 고정만 잘 되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 슈퍼 테크니컬 하이브리드 샘이 솟아 리오 베이비 느낌으로 엄청난 기술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저 상처 안 나고 부드럽게 면도만 잘 되면 그만이다.
와이즐리의 제품들은 이런 필수 조건들은 모두 충족하면서, 고객들의 기존 불만은 해결할 수 있는 제품들을 만들었다. 개발자들이 '적정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이런 것들이 말로하기는 쉬워도 진짜로 기술적으로 구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쉬웠으면 독과점 상태가 아니었겠지)하지만 그들은 방법을 찾아냈고, 사업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존경스럽다.
3. 생활을 편하게 해 준다 - NETFLIX
면도날은 소모품이라 구매주기가 중요한데, 기존에는 이걸 얼마나 자주 갈아주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면도가 잘 안되면 갈아준다고는 했지만 피부 상태에 따라서, 면도기 관리상태에 따라서 면도 느낌은 늘 달라지는 것이다 보니 이 또한 쉽지 않은 데다가, 면도날을 언제 바꿨는지 기억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또 면도날을 사러 마트에 가도 내가 쓰는 모델의 면도날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보니 교체 주기도 늘 들쭉날쭉하고 이래저래 시간과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카테고리였다.
반면 와이즐리를 쓰고 나서는 이런 고민이 한결 줄어들었는데, 우선 와이즐리에서 2주라는 명확한 교체주기를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보름/말일 기준으로 생각하고 바꿔주니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또한 미국의 달러 쉐이브 클럽처럼 정기구독 형태로 이용하니 면도날을 사러 따로 마트나 편의점에 갈 필요도 없이 무료배송으로 주기에 맞춰 받아볼 수 있게 되었다.
NETFLIX 가 사실 이런 편의성과 1:1로 매칭 할만한 브랜드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생각할 필요 없이 하나만 구독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 브랜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관점의 브랜딩
기존 면도기 회사들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독점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팔고 싶은 방향으로 면도기 시장을 이끌 수 있었고, 그들이 택한 방식은 면도기를 생활용품이 아닌, 남성성을 강화하는 브랜드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야 제조원가 대비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고, 5중, 6중, 7중 날 등 기술개발에 투자한 금액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근육질의 남성, 섹시한 여성을 활용해서 남성성을 강화하는 브랜드 광고, 특수 기술을 강조한 광고를 했다. 가격 저항선이 높아서, 또는 전환 비용이 높아서 제품이나 브랜드를 안 바꾸려고 하면 판촉 사원을 투입해서 영업을 하고, 프로모션을 해서 새로운 제품을 쓰게 만들었다. 카트리지끼리 호환이 되지 않게 해서 계속해서 새로운 제품을 사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광고비, 판촉비용은 모두 제품 가격에 반영되었다. 남성성을 강화하는 면도제품들의 브랜딩은 이렇게 오롯이 회사의 이윤 극대화를 위한, 회사 관점의 브랜딩이었다. 사실 이런 사례들은 경영전략이나 마케팅 수업에서도 많이 나온다. 회사의 1차 목표는 이윤창출이기에, 회사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매우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그리고, 고객관점의 브랜딩
그러던 중, 이커머스가 발달하고 사람들의 구매 방식이 달라지면서, 미국에는 달러 쉐이브 클럽이 등장하고, 우리나라에는 와이즐리가 생겼다. 그들은 기존의 방식, 면도기 = 남성 이미지 제품이라는 공식에 의문을 품었다. 매일 사용하고, 화장실에서 혼자 사용하는데 화려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기존의 공식보다는 면도용품이 가진 본질에 집중했다. 생활재에 맞는 저렴한 가격, 피부에 닿는 칼날이기에 필수적인 절대품질, 지속 사용하는 제품에 맞는 구독 모델을 제안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화려한 모델과 광고가 없이도, 나 같은 고객들의 마음에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다.
마무리
8900원짜리 스타터 패키지에서 시작한 스토리는 이렇게 진정한 브랜딩이란 무엇일까라는, 조금 많이 도약한 결론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아마 앞으로도 와이즐리가 없어진다거나 갑자기 품질이 나빠진다거나 가격이 2배로 오른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 이 제품을 계속 쓸 것 같다.
이렇게 쓰고 나니 글이 굉장히 광고 같지만, 진짜로 미약하게나마 광고가 돼서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와이즐리 제품을 썼으면 좋겠다. 그래야 회사가 번창하고 나는 계속해서 좋은 제품을 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글을 쓰고 생각을 담는 모임, #쓰담의 멤버로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