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와 두려움 가득했던 취준생의 7년 전 여름
그런 순간이 있다. '그래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진짜 아무것도 안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변하는 순간. 7년 전 여름, 그 해 상반기 나는 지원했던 모든 회사에 불합격했다. 정식으로 취업 준비를 한 지 1년, 인턴 준비까지 포함하면 1년 반이 된 시점이었다. 그리고 대학생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무소속 취준생'이 된 지 약 반년이 지난 후였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결국 다시 취준생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혼자 남았다는 것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동안 함께 울고 웃으며 함께 취업을 준비하던 친구들은 모두 이름만 들으면 아는 대기업에 합격한 상태였고, 나는 우울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그들에게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야 했다. "너도 잘 될 거니까 너무 걱정 마"라는 사람들의 격려에 애써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때의 나는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답이 보이지 않았다. '노력이 부족했던 걸까?' '아니 자소서에 의성어만 써도 붙었다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걸까?' '그럼 도대체 이제까지 왜 그렇게 노력한 거지?' 깨어있는 매 순간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보다 못해 여행이라도 좀 다녀오라는 엄마의 말에 있는 돈을 탈탈 끌어모아 제주도로 가는 가장 저렴한 비행기표를 끊었다. 사람 많은 관광지는 가고 싶지 않았고, 혼자서 배낭을 메고 올레길을 걸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걸은 길이었는데, 걷는 동안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파도가 부딪치는 절벽이 있는 어느 해안가에 도착했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지난 면접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어딘가 당당하지 못하고 끌려다녔던 느낌. 꼭 취업하고 싶다는 마음에 오히려 무리수를 두기도 했고, 불합격이 계속되며 자신감이 떨어지고 우울해지면서 위축된 모습만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좀 더 자신감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조금이라도 결과가 달라졌을까. 문득 함께 취업을 준비했다가 먼저 합격이 된 한 친구가 떠올랐다.
'이번에 취업 안되면 아버지가 가게라도 하나 차려주신다고 했어.' 함께 모여 취업의 어려움을 토로하던 그때 그 친구는 늘 이런 이야기를 했었고, 이렇게 나름 믿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늘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결국 그 친구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운 좋게 붙었다고 하며 모 기업에 입사를 했고, 공교롭게도 그곳은 내가 예전부터 가장 가고 싶어 하던 회사였다. 좌절과 질투 그리고 원망이 뒤섞인 감정이 따라 올라왔다. 왜 나처럼 절실하고 다른 대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대안이 많고 여유 있는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것일까.
자신감 있고 여유 넘치는 사람은 첫인상부터가 좋고, 역량을 더 잘 보여줄 가능성이 높다. 굳이 어려운 책을 보고 분석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런 믿는 구석도 없는 - 이를 테면 엄청난 스펙이나 취업이 안돼도 상관없는 무언가 - 취준생이, 이렇게 자신감 넘치기가 참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열등감 가득했던 그 시절의 나는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는 스펙과 집안이 없는 나 자신의 현실이 너무 답답했다. 나를 뒷받침해줄 것이 없기에 결국 나는 계속 자신감이 없을 것이고, 그럼 결국 나는 계속 실패만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다 갑자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으로 내가 그렇게 모자란가? 내가 이렇게 실패만 할 정도로 대충 인생을 낭비했었나? 돌이켜보면 대학생활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틈틈이 아르바이트도 했고 사회활동도 열심히 했다. 힘든 군대생활을 버텨내면서도 조금이라도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고, 취업준비도 스터디를 조직해가면서 최선을 다해 임했었다. 아니 근데 솔직히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것도 못 얻어내면 너무 억울한 거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나도 모르게 생각이 명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면, 그냥 나를 믿자. 가게를 해줄 집안은 없지만,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무사히 대학 졸업을 한 나를, 어학연수 교환학생 한번 못 가봤지만 열심히 영어 공부해서 부족함 없는 점수를 만들어 낸 나를, 가만히 머물기보다 항상 새로움에 도전했던 대학생활을 했던 나를."
돌이켜보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신기하고, 좀 오그라드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 짧은 선언은 그 이후 나의 인생을 정말 많은 부분에서 바꿔놓았다. 그 이후 취준 삼수를 시작하며, 똑같이 서류와 면접을 떨어지는 일들이 가득했지만 매 순간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었고, 결국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살면서 믿을 구석이 하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할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강남에 빌딩 한 채 가지고 있었으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었으면. 하지만 신기하게도 현실은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고, 항상 믿는 구석 하나 없이 맨 몸으로 하나하나 부딪혀서 얻어내야 하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심지어는 최선을 다했다고 해도 운이 나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지금껏 해온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더 그래서 그 힘든 현실을 하루하루 버텨내주고 있는 나 자신을 믿어주고 아껴주어야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기에, 믿는 구석이 없기에 공허하게 곧 불안이 되고는 한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해왔다면, '이렇게 했는데 뭐라도 되겠지.'라는 조금이라도 더 근거 있는 자신감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믿을 구석 하나 없다면, 나라도 한번 믿어보자.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아준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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