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에서의 깨달음은 그 무엇보다 값지다.

by 림미노





평소에는 추호도 갈 생각이 없었던 등산이었다. 다리만 아프지 하면서

줄곧 인생에서 등산을 멀리해 왔던 나에게 친구 놈의 연락이 왔다.


" 무릉 계곡 ㄱㄱ? "


동해 무릉 계곡에 가자는 이 한마디를 듣자마자 알 수 없는 오묘한 끌림이 생겼고, 에라이 등산이나 하면서 맑은 공기나 마시며 여태껏 내가 하고 있던 생각들이나 정리해 보자라는 심산으로 무턱대고 "ㄱㄱ"라며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어찌어찌 버스를 타고 무릉계곡으로 가 티켓을 샀고, 그렇게 산행을 시작했다.

산행을 시작한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내가 고약한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과대망상증이다.


어렸을 때는 그저 아빠를 졸졸 따라다니느라 고개를 처박으며 걸었던 탓에 산은 지루하구나.. 다리 아프구나..라는 생각만을 했고, 정상에 도착해서 먹는 김밥 한 줄과 뜨거운 컵라면을 먹는 순간만이 내 등산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스물한 살이 된 지금의 나에게 등산은 어딘가 낯설었다. 등산을 하는 내가 갑작스럽게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나무에 줄을 묶어놔 이 방향이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산행 표식 줄을 보고 갑자기 "저건 산에서만 볼 수 있는 이곳만의 내비게이션 같네"라고 망상하거나, 이는 아래에서 써 내려갈 것인데, 이 산 전체에 망상과도 가까운 의미 부여를 한다던가.. 무언가가 달라져있었고, 가히 과대망상증이라고 할 만한 나 자신에 어딘가 낯섦을 느꼈다.

뒤늦게 관점 찾는 것에 대한 흥미와 가치를 느낀 까닭에, 또한 방학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생긴 까닭에, 천천히 걸으며 사물들 하나하나를 관찰하며 사색하는 새로운 버릇이 생겨났다.


그러나 제대로 된 장비도 갖추지 못하고 눈에 뒤덮인 산에 오를 때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눈이 펑펑 내려 바닥이 얼어붙은 산은 위험하기도 했기에 평소에는 가보지 못했던 것이지만, 스물한 살의 깡으로 이를 도전했다. 나는 그렇게 눈으로 덮인 산길을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걸어가는 것도 잠시,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도저히 성큼성큼은 갈 수 없었다. 이제는 덮인 산길이 아니라 얼음으로 뒤덮인 빙판 같았던 눈길은 너무 미끄러웠고, 세 번 발을 디딜 때마다 꼭 한 번은 미끄러졌으며, 앞에서는 갓 태어난 고라니처럼 탭댄스를 추는 불안정한 친구를 보며 다시 한번 정신이 빼앗기고, 그렇게 넘어지기를 반복하였다.

그렇게 결국 상처가 나고 말았고..


그래서 나는 자연스레 다른 사람이 먼저 밟고 간 발자국을 보며 걷기 시작했다. 먼저 이 산을 올랐던 사람들의 발자국을 내 발과 맞춰가며 조심조심 걸었다. 그러자 문득 생각이 들었다. 먼저 갔던 사람의 발자취를 보며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레 내딛는 것은 어쩌면 우리 인생과도 닮아있다고 느낀 것이다.


뜬금없이 표출된 내면의 문학적 사고에 어딘가 낯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생각을 이어나가 보기로 했다.


등산을 할 때 나무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누군가 이 산을 먼저 올랐던 사람들은 나무에 끈을 매달아 놓거나, 색을 칠해놓으며 이 길로 오세요~라는 표식을 남겨준다.


그렇게 우리는 앞사람이 닦아놓은 길을 한편으로는 편안하게 갈 수 있고, 한편으로는 이런 길이 안전한 길이구나 하며 직접 듣고 배우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학습하게 된다. 그렇게 안전했던 길을 걷다가 걷다가 우리는 그 길이 끊기는 순간에 마주하게 되고, 우리는 이제껏 산길에서의 알 수 없는 선생님으로부터 학습받은 것을 언젠가 새로운 길을 개척할 때에 떠올리며 길을 개척하게 된다.


가끔은 어른들의 말이 꼰대 같아서, 듣기에 거북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꼰대이기 전에 어른이었고, 우리보다 먼저 인생을 살아갔던 것은 분명했으며, 그 인생은 분명히 우리보다는 거친 인생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닦아놓은 길을 걸으며 우리는 안주하며 살아왔고, 먼저 갔던 이들의 조언들은 어느새 도움이 되는 말들이 아닌 간섭하는 말들로 여겨졌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어른들의 말을 믿어보자는 건 아니다. 군자가 아닌 이상 그들도 분명 부족한 점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이 먼저 살아온 인생에서 느꼈던 무언가를 단순히 무시하지는 말고, 곱씹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점을 다시금 확신하는 과정을 거쳤다. 우리는 어른들의 말을 곱씹어보며, 스스로 생각해 보는 과정에서 나와 어른들과의 유사점을 찾을 수도, 또는 이견이 나타날 수도 있을 테지만 유사점이든 이견이든 둘 다 그 나름대로 나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이는 자고로 어른들의 얘기뿐만 아니라, 나보다 어린 사람, 나와 동갑인 사람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용추폭포, 쌍폭포에 다다랐다. 어렸을 때 단순히 힘들다고 느꼈던 산행에서, 스물한 살의 산행과 지금의 산행은 무언가 다른 묘미가 느껴졌다.


어렸을 때는


힘들었고, 고생했고, 산에 올랐다.

성취감이 느껴진다. 라는 생각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달랐다.


힘들었고, 고생했고, 산에 올랐다.

이야 성취감을 느꼈구나,

앞으로 살아갈 삶에서의 원동력이 느껴진다.


라는 나름대로의 생각의 발전으로 이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단순한 성취감에 얻은 것에 그쳤던 어렸을 적의 나는, 이제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원동력을 받았고, 내가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해 응원을 받았다는 걸 느꼈다.


산에 올랐을 때 "야호"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내가 앞으로의 인생을 산 정상에 오르듯이 올라 성취해 내겠다는


하나의 다짐이자 선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을 내려갈 때에는 올라가면서 했던 생각들을 곱씹어보고, 생각 정리의 시간을 가지게 됐다. 올라갈 때는 생각하느라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과거 선조들이 적어놓은 "시"들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 표지판으로 적어놓은 것을 볼 때였는데, 시가 처음으로 내게 깊게 와닿는 순간이 되었었다. 조상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았구나.. 시대를 초월한 동질감이 어느샌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산에 다 내려왔을 때, 문득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가 왜 이리 등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지 그것이 궁금했다. 등산을 하며 일상에서의 걱정과 긴장들을 다 내려놓고,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새로운 생각으로의 전환을 꾀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다가 생각하다가 곧 산에 정상에 오르면, 그 나름대로의 성취감을 얻어 일상에서의 원동력과 자신감을 받아가고, 내려갈 때에는 올라가면서 했던 생각들을 정리하며 머릿속을 말 그대로 맑게 바꿔나가는 과정이었는지. 궁금했다.


집에 와서 이 글을 쓰는 와중에 나를 돌아보았다. 산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내게는 결코 시간낭비는 아니었다. 하나하나에 의미부여를 하며, 비유해 보고, 삶에 대한 확실한 내 가치관을 형성시킬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산행에서 나는 시의 매력을 조금이나마 알게 됐던 것 같다. 또한 내려오면서 하나 더 생각한 건, 어떤 경험이든 돌아보면서 안 좋았던 건 안 좋았다고 사실대로 고하며 부족했던 건 뭔지, 내가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 좋았던 건 좋았던 대로 왜 좋았는지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해 좀 메모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남들 다 하길래 따라서 서로 이웃했던 김시래 교수님 칼럼에서, "관점이 있어야 글이 써진다"라는 말이 봤던 것이 떠오른다. 정말 내 나름대로 관점을 갖추고 글을 쓰니 어느 정도 내 생각의 표현이 그 이전과는 달라짐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광고를 하려면, 일단 내 관점으로 보는 법을 훈련해야 함을 여실히 깨달았으며, 내 관점을 확실히 표현하는 훈련의 과정을 거친 그 이후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관찰하며, 수용하고 이해하는 과정으로 이어져나가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스물한 살 지금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어렸을 때 이 과정을 했으면 정말 좋았겠다고 아쉬워했지만, 늦은 만큼, 놓친 만큼 한시라도 더 빨리 걸음을 내딛어야겠다.


이제는 단순히 성취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원동력과 깨달음을 얻어가는 그 자체가 내 등산의 목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