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벽돌담을 부수자

by 림미노

햇살은 강하게 내리쬐고, 살갗은 점점 익어가는 듯 보인다. 더위이다. 나는 언제 극도로 짜증 날까? 아니,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언제 짜증을 낼까? 무더운 여름날에 사람들의 스트레스 수치가 높아진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정설로써 사람들에게 전해져 오고 있다. 이러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나는 더위를 무지막지하게 싫어한다. 온갖 짜증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책장에 꽂혀 있는 잊힌 책들처럼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한다. 또한 가히 생명 유지 장치라고 불리는 에어컨은 필수이다. 이번 여행에서 이를 조금이나마 체감해 본 것 같다. 한국은 현재 겨울이었기에 못 느꼈을 테지만, 필리핀에 갔었기에 이 짜증 나는 더위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한국에서 곧 마주하게 될 짜증 나는 여름에 대비한 대응 훈련이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임했다.


어쩌다 보니 극한의 "짜증"의 순간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해 보자, 로 발전되어 갔다. 더움이 너무 싫었던 나였기 때문에, 어쩌면 짜증을 이겨내는 이러한 과정을 임했을 때, 인간관계를 갖추고,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될 간격, 그리고 갈등의 순간에도 어느 정도 내성을 갖추게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이었다. 생리적으로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이 순간들을 그렇게 인내한다면. 무작정 상황에 대한 어떤 판단을 거치지 않고, 표출해 내는 짜증에서, 짜증을 내보내야 하는 상황인지, 아닌지를 분간해 내며 살아갈 수 있을 테고, 그렇게 내가 좀 더 성숙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짜증을 이겨내 보고자 여러 상황들을 꾹 참아갔다. 예컨대 같이 여행을 간 여자친구의 사진 좀 찍어달라는 반복적인 요구, 평소 같았으면 얼굴을 오만상 찌푸리고 짜증이란 짜증인 다 티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수련하는 상황이니.. 속으로 내심 내가 왜 이게 짜증 나는지 생각을 해봤다. "그냥 귀찮아서", "반복되는 메시지가 싫증 나서", "내 시간을 침해받는 것 같아서" 등등의 여러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내 생각을 마치고 여자친구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봤다. 여자친구는 평소에 자신의 모습이 잘 나오는 사진을 많이 찍어놓는다고 했다. 그러자 "인생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아마 여자친구도 같은 맥락에서 이를 말했을 것이다. 여자친구는 인생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뿐이었다. 인생의 한 순간이니 조금이라도 더 잘 나오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요구 사항을 내게 전했던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간격이 생긴 것이다. 순간 내가 너무 쪼잔해지는 것 같았다.


많은 생각을 한 게 아니었다. 단지 내 생각, 너 생각 이렇게 두 개의 생각을 해봤을 뿐이다. 역지사지의 중요성은 여기에서 나온다. 나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며 나 자신이 왜 짜증 나 있는지를 찾았다면, 그녀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며, 그녀가 왜 이러는 걸까?라는 이해를 통해 의미 없는 충돌로 허비되었을지도 모르는 귀중한 경험의 시간을 구했다.


인간 평균 수명이 70년 정도라고는 하지만, 살다 보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다. 당장 오늘 죽을 수도 있는 노릇인데, 하루하루의 소중함에 대해서 안일함을 느꼈던 과거의 나였던 것 같았다. 이후 하루의 소중함을 느끼고, 1분 1초의 시간이 금같이 느껴지는 무렵에는 무언가 삶을 살아가는 태세가 달라짐을 느끼게 됐다.


여행의 또 다른 묘미를 찾은 것 같다. 익숙했던 삶을 살아오고, 그것에 적응하였던 평상시 일상 상황에서 여행이라는 걸 통하여 낯선 장소에서 낯선 상황과 처음 맞이하는 광경들을 통해 다시 한번 삶을 재정의하고, 이미 익숙해져 단단히 쌓아진 벽돌 같은 인생을 다시 한번 부수고 새로운 경험들이라는 더욱더 단단하고 견고한 재료들로 쌓아가는 벽돌 담장이라고 생각된다.


견문을 쌓는다는 말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