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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가주 Nov 21. 2022

엄마의 엄마

 우리 가족에겐 자동차가 없었다. 절약을 강조하셨던 아버지는 자동차를 사치품으로 여기셨다. 그래서 휴가나 명절에는 기차를 타거나 다른 사람들의 차에 얹혀서 고향을 방문했다. 엄마는 그런 현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다만 삼천포에 사시는 할머니를 자주 보러 가지 못해 가끔 서운함을 내비치시곤 하셨다.


 위로 언니만 셋을 둔 막내딸로 태어난 엄마였다. 아들이 귀한 그 시절, 아들을 간절히 바라고 낳은 네 번째 자식이 딸이라는 사실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적잖이 실망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네 명의 딸을 남겨두고 일찍 돌아가셨다. 딸들의 양육은 오롯이 할머니의 몫이 되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셨고 네 명의 딸은 무탈하게 자랐다. 시간이 흘러 다들 각자의 가정을 꾸린 뒤에도 가끔은 이모들과 엄마, 할머니까지 할머니 댁에 모여 밥을 먹었다. 다들 모여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면 막내딸인 엄마와 할머니 사이는 보통의 모녀와는 다른 감정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짐작을 해보곤 했었다. 


 대학시절 친구들과 할머니 댁으로 여행을 갔다. 입대 전 친구들과 추억을 남기고 싶어서였다. 할머니가 사시는 삼천포 근처에는 해수욕장도 있고, 돈이 많지 않은 대학생들인 우리에게는 숙박비도 아낄 수 있어 안성맞춤이었다. 출발 당일 엄마는 할머니를 귀찮게 하지 말고, 밥은 사 먹고, 할머니 집 청소도 하고 오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놀러 가는 날 아침에 잔소리를 왜 하냐며 적당히 대답을 하고 집을 나섰다. 


 할머니는 나와 내 친구들을 반갑게 맞아 주셨다. 나도 오랜만에 만나는 할머니가 몹시 반갑고 좋았다. 나는 어린 시절의 일부를 할머니 댁에서 보냈었다. 부모님께서 같이 가게를 운영하시며 자리를 잡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낼 때, 나를 잠시 할머니 댁에 맡겨 두셨다. 할머니는 당신의 직설적인 말투와 성격으로 나를 귀하지도 엄하지도 않게, 적당량의 물기를 머금은 물티슈처럼 나를 녹녹하게 대해 주셨다. 그래서 그런지 그 시절 나는 할머니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내뱉으시는 말들이 내 속을 후련하게 해줘서 할머니가 좋았다.


 친구들과 낮에는 해수욕을 즐기고 저녁에는 할머니 집 마당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술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루에 누워 한 여름밤에 부는 선선한 바람으로 술기운을 씻어내며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도시의 하늘과는 다르게 맑은 시골 하늘에는 잘게 부서진 수정 조각들이 흩뿌려진 거처럼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여기서 볼 수 있는 이 별들을 할머니와 엄마도 보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할머니와 엄마를 거쳐 나에게까지 도착한 이 광경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이 찰나 같은 순간을 간직하고 싶었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기억에서 희미해질 때쯤 다시 사진을 꺼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1박2일의 짧은 시간을 보내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할머니의 안부를 물으며 할머니를 귀찮게 하지 않았냐, 괜히 가서 집을 어지럽힌 건 아니냐며 도착하자마자 쏘아댔다. 나는 당당하게 대답할 자신이 없어 괜히 말을 돌리며 할머니를 찍은 사진을 보여 드렸다. 말을 쏟아내던 엄마는 자신의 엄마의 사진을 바라보시곤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그리곤 핸드폰 액정을 쓰다듬어 보시며 작은 목소리로 ‘엄마, 왜 이렇게 주름이 늘으셨나…’며 나직이 읊조리셨다.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던 나의 엄마를 바라 보았다. 누군가의 딸로서 살아온 그녀의 시간들은 어떤 모습으로 채워져 있을까. 그려지지 않는 엄마의 과거를 생각하며 이유 모를 뭉클함이 느껴졌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여 엄마의 핸드폰에 할머니의 사진을 넣어 드리고 방으로 후다닥 들어왔다. 샤워를 하고 짐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을 열어 할머니 댁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보았다. 사진 속에 있는 밤 하늘에도 별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밤 내 안에 머물던 신비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핸드폰을 닫고 침대 위에 누웠다. 도시의 밤과 같은 짙은 회색 천장이 보였다. 마음이 텅 비고 건조해지는 거 같았다. 그날의 별들이 보고 싶었다. 내 엄마의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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