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는 건 약한 마음이 아니라 그냥 게을러서다.

by YEON

집, 책상, 심지어 가방 정리도 잘하는 내가 유일하게 못하는 정리는 '관계'다

우선 나는 좁고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타입에 속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와 깊고 두터운 관계를 맺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한번 연이 되면 소홀히 흩날려 버리지 않는 의리가 있다. 하지만 이 특징을 '일'이라는 필드에 대입시키면 아주 취약한 단점이 된다.


맞다. 난 잘 끊어내지 못하는 인간이다.






나는 클라이언트와도 함께 일하는 팀원들과도 꽤 오래 합을 맞춰오고 있다. 시간으로 신뢰를 쌓아온 갑과 을의 '합' 나는 이런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하지만 꼭 끊어내야 할 관계도 있다는 것을, 관계에도 강단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피부로 배운 해다.


2년 넘게 일을 맡아 도와주었던 곳이었다. 2년 8개월 전엔 그 회사도 스타트업이었고 나도 초보 사장이었기에 양간의 열정 합이 잘 맞아떨어졌다. 많은 프로젝트를 함께했다. 그리고 무서울 정도로 2년간 눈부신 성장을 했고 바로 내 눈으로 지켜봤다. 왠지 그 성공 어딘가엔 내 도움이 덕을 보탠 것 같아 뿌듯했다.


그러다 그들은 땅도 사고 건물도 짓고 신제품을 마구 찍어 내다가 갑자기, 결국, 지금은 폐업 수순을 밟고 있다고 한다.


대강 그렇다 할 이유는 알지만 정확한 그들의 '빚 사정'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올해 총 5개월에 달하는 비용을 정산받지 못했다. 실로 한 3달째 까지는 잘 채근도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5달이 되던 8월, 사업장의 존폐위기를 맞았다며 전해왔다.




우리의 지난 2년을 회고하며(아니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꽤 오랜 대화를 나눈 후 조심히 물었다.


"그럼 미정산 금액은 언제 정산 가능할까요?"

"어떻게 해서든 다음 주 수요일까지 줄게요. 정말 미안해요. 면목이 없어요"


그렇게 몇 번의 일주일을 더 미루더니 결국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갑자기 현타가 밀려왔던 연락두절 한 달이 넘어가던 날이었다. 보통은 신호가 끊길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연속으로 걸지 않았지만 그날은 나도 마음을 먹었던 것이었다. 5통 정도 했을까? 신호가 끊길 때쯤 남자 대표는 '네'라고 했다.


"네 대표님, 잘 지내셨나요?"

"뭐 때문에 연락했는지 잘 알아요. 정말 미안해요"

"아이고.. 염려가 크시지요.. 네.. 저도 미정산 금액이 꽤 커서요, 언제쯤 받을 수 있는지 얼마나 더 기다리면 될지 대충이라도 알려주셔야 할 것 같아 전화드렸어요."

라고 했더니, 정말 어이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근데 지금 다른 일도 하고 있지 않아요? 어쨌든 돈 벌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하죠.. 그게 왜요?"

"우리는 정말 죽을 것 같아요. 돈 벌고 있으면 괜찮지 않나? 일단 좀 기다리고 있어 봐요."


와? 아차 싶었다.

참 쓸데없는 연민과 오지랖을 매너까지 지키며 부리고 있었구나..


나는 남에게 클라이언트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않는 편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내 글감이라도 돼주어야 속이 펴겠다.


추후 그 회사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팀장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직원들 월급도 주지 않고 연락이 두절되었다 한다. 하여 그들은 고용노동부에 임금체불 진정서를 신청하여 정부에서 일단 지급받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라고 잠시 또 연민의 마음이 들던 찰나, 직원분이 전해준 그들의 벼랑 끝을 들어보니 인류애가 사라졌다.


'어차피 자기는 파산 신청하면, 직원들 월급은 물론이고 거래처 미수금도 안 갚아도 된다고..'


그래 원년 멤버였던 직원들 월급도 안 주는데 외부인(나)의 미수금쯤이야 아예 고민도 안 했겠다.


사실 이 클라이언트와는 지난 2년간 여러 번 내가 먼저 끝을 낼 명분이 있었다. 꽤 감정 기복이 심했던 여자 대표는 기분에 따라 말을 뱉어댄 탓에 내게 두어 번 말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그 수치심을 누르고 계속 일을 도와줬을까? 그토록 돈이 궁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관계를 끊어내지 않았던 이유는 사람을 잘 믿어서 또는 신의가 있어서,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솔직하게 난 관계에 게을렀던 거다. 싸한 알람을 무시하고 관계를 끊어내며 마주할 그 불편한 순간의 감정을 그냥 피한 거다.

내 탓이오.


벼랑 끝에 서면 인간은 정말 추해질까?

그러든지 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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