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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Dec 12. 2022

정리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는 건 약한 마음이 아니라 그냥 게을러서다.

집, 책상, 심지어 가방 정리도 잘하는 내가 유일하게 못하는 정리는 '관계'다

우선 나는 좁고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타입에 속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와 깊고 두터운 관계를 맺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한번 연이 되면 소홀히 흩날려 버리지 않는 의리가 있다. 하지만 이 특징을 '일'이라는 필드에 대입시키면 아주 취약한 단점이 된다.


맞다. 난 잘 끊어내지 못하는 인간이다.






나는 클라이언트와도 함께 일하는 팀원들과도 꽤 오래 합을 맞춰오고 있다. 시간으로 신뢰를 쌓아온 갑과 을의 '합' 나는 이런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하지만 꼭 끊어내야 할 관계도 있다는 것을, 관계에도 강단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피부로 배운 해다.


2년 넘게 일을 맡아 도와주었던 곳이었다. 2년 8개월 전엔 그 회사도 스타트업이었고 나도 초보 사장이었기에 양간의 열정 합이 잘 맞아떨어졌다. 많은 프로젝트를 함께했다. 그리고 무서울 정도로 2년간 눈부신 성장을 했고 바로 내 눈으로 지켜봤다. 왠지 그 성공 어딘가엔 내 도움이 덕을 보탠 것 같아 뿌듯했다.


그러다 그들은 땅도 사고 건물도 짓고 신제품을 마구 찍어 내다가 갑자기, 결국, 지금은 폐업 수순을 밟고 있다고 한다.


대강 그렇다 할 이유는 알지만 정확한 그들의 '빚 사정'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올해 총 5개월에 달하는 비용을 정산받지 못했다. 실로 한 3달째 까지는 잘 채근도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5달이 되던 8월, 사업장의 존폐위기를 맞았다며 전해왔다.




우리의 지난 2년을 회고하며(아니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꽤 오랜 대화를 나눈 후 조심히 물었다.


"그럼 미정산 금액은 언제 정산 가능할까요?"

"어떻게 해서든 다음 주 수요일까지 줄게요. 정말 미안해요. 면목이 없어요"


그렇게 몇 번의 일주일을 더 미루더니 결국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갑자기 현타가 밀려왔던 연락두절 한 달이 넘어가던 날이었다. 보통은 신호가 끊길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연속으로 걸지 않았지만 그날은 나도 마음을 먹었던 것이었다. 5통 정도 했을까? 신호가 끊길 때쯤 남자 대표는 '네'라고 했다.


"네 대표님, 잘 지내셨나요?"

"뭐 때문에 연락했는지 잘 알아요. 정말 미안해요"

"아이고.. 염려가 크시지요.. 네.. 저도 미정산 금액이 꽤 커서요, 언제쯤 받을 수 있는지 얼마나 더 기다리면 될지 대충이라도 알려주셔야 할 것 같아 전화드렸어요."

라고 했더니, 정말 어이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근데 지금 다른 일도 하고 있지 않아요? 어쨌든 돈 벌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하죠.. 그게 왜요?"

"우리는 정말 죽을 것 같아요. 돈 벌고 있으면 괜찮지 않나? 일단 좀 기다리고 있어 봐요."


와? 아차 싶었다.

참 쓸데없는 연민과 오지랖을 매너까지 지키며 부리고 있었구나..


나는 남에게 클라이언트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않는 편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내 글감이라도 돼주어야 속이 펴겠다.


추후 그 회사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팀장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직원들 월급도 주지 않고 연락이 두절되었다 한다. 하여 그들은 고용노동부에 임금체불 진정서를 신청하여 정부에서 일단 지급받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라고 잠시 또 연민의 마음이 들던 찰나, 직원분이 전해준 그들의 벼랑 끝을 들어보니 인류애가 사라졌다.


'어차피 자기는 파산 신청하면, 직원들 월급은 물론이고 거래처 미수금도 안 갚아도 된다고..'


그래 원년 멤버였던 직원들 월급도 안 주는데 외부인(나)의 미수금쯤이야 아예 고민도 안 했겠다.


사실 이 클라이언트와는 지난 2년간 여러 번 내가 먼저 끝을 낼 명분이 있었다. 꽤 감정 기복이 심했던 여자 대표는 기분에 따라 말을 뱉어댄 탓에 내게 두어 번 말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그 수치심을 누르고 계속 일을 도와줬을까? 그토록 돈이 궁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관계를 끊어내지 않았던 이유는 사람을 잘 믿어서 또는 신의가 있어서,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솔직하게 난 관계에 게을렀던 거다. 싸한 알람을 무시하고 관계를 끊어내며 마주할 그 불편한 순간의 감정을 그냥 피한 거다.

내 탓이오.


벼랑 끝에 서면 인간은 정말 추해질까?

그러든지 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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