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휴가 중 제일은 교통사고였다나.
2022년 7월 16일, 100:0 과실로 4중 추돌 사고를 당했다. 5차선 중 맨 끝 차선으로 달리고 있던 우리에게 5돈 트럭이 실선을 위반하며 들이받았고, 우리 차는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가드레일을 박고서야 멈췄다.
아 물론 과실 100은 트럭이다.
내 인생에 이렇게나 큰 교통사고는 2번째다.
첫 번째 교통사고는 2017년 택시를 타고 가던 중 불법 유턴하는 음주운전 차가 택시를 들이받았다.
난 바로 의식을 잃었고 구급대원이 깨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입원을 했다.
사실 외관적인 찰과상과 타박상은 이번 사고보다 더 심했지만, 당시 나는 회사의 (정확히 말하자면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병원에서 제시한 2주 입원을 일주일로 줄여달라고 했다. 심지어 병원에서도 매일 일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병신 같다.
이번 사고는 트럭이 차를 박고 차가 돌던 순간에도 이윽고 바로 3번의 충돌 충격이 있었을 때도, 가드레일을 박았을 때도 의식을 잃지 않았다.
오로지 "와 나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문장만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모두들 평생의 운을 싹 긁어 가져다 썼다고 말한다.
앞으로 적어도 10년 동안은 네 인생에 로또 따위는 없을 거라며.
사고차는 폐차를 할 정도로 망가졌지만, 천운으로 나와 동승자 모두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았다. (심지어 함께 있던 강아지마저도)
그렇게 2주간의 입원 생활을 시작했다.
바로 다음 주 줄줄이 잡힌 미팅부터 취소해야 했기에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클라이언트에게 연락하여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당분간은 대면 미팅이 어려울 것을 전했다.
소식을 들은 클라이언트는 괜찮다며 프로젝트 기간을 연기해주었고 정말 급한 이슈가 아니면 연락도 잘 오지 않았다. 물론 나 대신 업무를 처리해주었던 팀원분들의 덕도 크다.
그렇게 갑자기 쉴 수 있는 명분이 주어진 것이다.
슬기로운 병동 생활
- 7:00 AM: 조리 선생님이 아침을 가져다주시며 나를 깨운다. 비몽사몽 일어나 아침을 먹다 보면 정신이 깬다.
- 9:00 AM: 양치를 하고 9시까지 책을 읽거나 단잠을 잔다.
- 10:00 AM: 오전 치료를 받으러 내려간다.
- 11:30 AM: 치료를 마치고 올라오면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고 간단한 회의를 하거나 업무를 본다.
- 4:00 PM: 오후 치료를 받으러 내려간다
- 5:30 PM: 치료를 마치고 올라오면 저녁을 먹는다. 저녁을 먹고 잠시 쉰다.
- 8:00 PM: 샤워를 하고 환복을 갈아입는다.
- 9:00 PM: 간호사 선생님이 병동 불을 끄고 가신다. 휴게실에 나와 쉬거나 담소를 나눈다.
- 11:00 PM: 보통 11시 이전에 잠이 든다.
"와.. 수동적인 삶은 이렇게 편한 것이구나."
2주 동안 내 삶의 메인 키워드는 '삼시 세 끼'와 '치료'였다. 그저 하루 3끼 먹고 하루 2번 치료받는 것뿐인데 하루가 참 알찼고 나름 바빴다.
물론 중간중간 일도 했지만 평소 양에 비하면 쉬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였다.
사고로 외관은 엉망진창이었지만 나는 밝았다.
새 삶을 받아서, 죽을 위기를 넘기며 얻는 깨달음 같은 이유가 아니었다.
웃기지만 장담할 수 있다. 일을 안 해서였다..
다소 수동적이긴 했지만 2주 동안 밥과 치료에 집중하느라 머리가 비워졌다. 프로젝트에 대한 것도 세금 고민도, 커리어, 스킬, 목표 등 자질구리한 걱정들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신기하게 하고 싶은 것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지금까지 해보고 싶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구겨 넣었던 작은 취미들과 도전해보고 싶었던 일.
하나도 겁날 게 없었고 그냥 재밌는 무언갈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들떠 정신이 맑았다.
올해를 돌이켜보면 난 때에 맞춰 잘 쉬었다.
여름에 휴가도 다녀왔고 10월엔 일본으로 휴가도 다녀왔다.
하지만 '정말로 잘 쉬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교통사고뿐이다. 아직도 후유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2주간 맑았던 정신을 지렛대 삼아 12월까지 잘 달렸다.
주체적으로 마음과 머리를 비울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스킬이었구나. 나는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