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런 신데렐라가 좋았다

by 걱정인형

어린 시절 나에게는 비디오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봤던 디즈니 만화들이 있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라이온킹’, ‘101마리의 달마시안’.


그중에서도 ‘신데렐라’를 가장 많이 봤다.
어느 정도였냐면, 신데렐라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를 거의 다 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이었다.


그때 보면서도 조금 충격이었던 장면이 있다.
쥐와 새들이 신데렐라를 깨우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잠에서 깬 신데렐라가 침대에 누운 채로 어젯밤 꾼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다 시계탑의 종소리가 울리고, 신데렐라가 신경질적으로 외친다.

“알았다니까. 매일같이 어서 일어나세요. 또 하루가 시작됐어요. 시계까지 명령한다니까.”


<신데렐라>에서 아침에 일어난 신데렐라


디즈니 공주가 아침에 빨리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라고 재촉하는 시계에게 신경질을 내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내가 생각하던 디즈니 공주의 이미지는 늘 온화하고 다정하고 착한 느낌이었는데, 의외로 인간적인 면모를 느꼈달까. 지금의 어른들 모습 같기도 했다. 하긴 신데렐라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계모와 언니들이 온갖 집안일을 시키며 매일같이 고된 노동을 하게 하니 아침의 시작을 미루고 싶은 마음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식탐이 많은 거스가 나오는 부분이다.
신데렐라는 쥐덫에 잡혀 있던 쥐 한 마리를 구해 주는데, 그 쥐의 이름이 바로 거스다. 거스는 신데렐라의 돌봄을 받게 되면서 떠돌이 쥐 시절과는 달리 비교적 풍족한 음식을 제공받는다.


신데렐라가 닭들에게 모이를 주다 구석에 있던 거스에게도 옥수수 알갱이를 한 움큼 건네준다. 거스는 기뻐하며 그 옥수수 알갱이를 차곡차곡 쌓아 입까지 벌려 물고 은신처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그때 고양이 루시퍼가 나타나고, 놀란 거스는 옥수수 알갱이를 모두 떨어뜨린 채 줄행랑을 치고 만다.


<신데렐라>에서 루시퍼를 마주친 거스


이 장면을 보면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래서 누군가 집에서 반찬 용기를 최대한 쌓아 옮긴다든지, 두 번에 나눠 드는 게 나을 것 같은 물건을 한 번에 위태롭게 들고 가는 모습을 보면 꼭 이 장면이 생각나 슬며시 웃음이 난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장면에도 거스가 등장한다. 이렇게 되짚어 보니, 내가 거스를 꽤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왕궁에서 기사들이 신데렐라가 남긴 유리구두 한 짝을 들고 신데렐라의 집을 찾아왔다. 이를 먼저 알아챈 계모는 신데렐라를 다락방에 가두고 문을 잠가 버린다. 그리고 다락방 열쇠를 주머니에 넣은 채 기사들을 맞이한다.


이때 쟈크와 거스는 계모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신데렐라에게 가져다주려 한다. 열쇠를 들고 다락방으로 향하던 중,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올려다본 거스는 그만 정신이 혼미해진 듯 휘청거리며 쓰러지고 만다. 계단 앞에서 얼어붙은 거스를 보고, 쟈크가 다급하게 말을 건다.


“거스, 힘내! 봐, 거의 다 왔어!”


<신데렐라>에서 다락방으로 가는 길을 보고 놀라는 거스


그 말에 다시 힘을 낸 거스는 쟈크와 함께 열쇠를 이고 지고 계단을 끝까지 올라간다. 결국 둘은 신데렐라에게 열쇠를 건네주고, 신데렐라는 다락방에서 나올 수 있게 된다.


어릴 때도 이 장면 속 거스가 너무 귀여워서 기억에 남았는데, 지금 다시 떠올려 보면 마치 PT를 받을 때 “다섯 개만 더!”라는 PT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버티던 내 모습 같기도 하다.


신데렐라에는 드레스로 변신하는 장면이나
유리구두 한 짝만 남기고 떠나는 유명한 장면들이 많다.
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건,

이야기 사이사이에 캐릭터들의 인간미가 드러나는 순간들이다.


아침에 조금 신경질을 내는 신데렐라와,

혼자 더 가지려 욕심을 부리다 실수하기도 하고

끝없는 계단 앞에서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나는 거스의 모습이 우리가 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아마 그런 이유로 나는 시간이 지나도

신데렐라를 계속 좋아하게 되는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인라인을 신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