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조각

주어진 키워드로 쓰는 아무 글#5 '경험'

by Igloo of Aningaaq


팀은 가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인 투수를 선발로 등판시킨다. 144경기나 되는 긴 여정 중 하나일 뿐 이라지만, 시즌의 말미에 한 두 경기 차이로 당락이 갈리곤 하는 이 바닥에선 결코 가벼운 결정이 아니다. 그럼에도 감독은 그토록 다듬어지지 않은 풋내기를 마운드에 올린다. 이런 경기는 종종 초반부터 큰 점수 차가 벌어진다. 야수들은 의욕 없이 긴 수비시간을 감당하느라 지쳐가고, 운집한 관중들은 본인들의 귀중한 시간을 앗아간 감독에게 욕설과 야유를 쏟아 붓는다. 그럼에도 아직 불펜에는 몸을 푸는 구원진이 없다. 코치진은 이미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이 젊은 선수에게 새빨개진 얼굴이 터지기 직전 까지 경기를 짊어지게 한다. 오래되어 노련하거나 관심이 두터워 박식한 팬들은 그것을 '세금'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 시간들이 중첩되어야 얻어지는, 10년간 팀을 이끌 보석 같은 선수를 키워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언젠가 그 선수가 이 팀을 구하고, 지탱하고, 이끌어나가 결국 우승시킬 것이라는 희망에 걸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팀은 그런 오욕과 고통의 순간을 기꺼이 감수한다. 단지 그 선수에게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


게임 속에서도 경험은 주요한 가치의 단위가 된다. 단순히 플레이어가 무형적으로 얻어지는 숙련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량화되고 수치화된 경험의 척도가 존재한다. 수많은 낭인들이 밤을 지새워 안구 속 모세혈관을 터뜨려가며 모으는 '경험치'라 불리는 것이다. 이것을 모아야만 캐릭터는 성장하고, 정해져 있는 세상 속의 다음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래토록 고인 플레이어들의 궁극적인 목표와는 결을 달리하지만, 모두가 마주하는 가장 원초적인 가치는 '경험'으로 부터 비롯된다. 결국 성장기의 그들이 하는 대부분은 '경험'을 쌓기 위한 단순 반복 활동일 따름이다.


이렇듯 경험은 다음 스텝을 위한 발판이 되곤 한다. 자신을 완전히 붕괴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약간의 고통을 동반한 경험은 몸과 마음에 굳은살을 베이게 하고 존재는 그로 인해 조금 더 강해진다. 그렇다면 경험의 본질은 성장을 위한 도구 일까.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도 한참 지났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게도 여전히 경험은 삶의 다음 스텝을 위한 양분일 뿐일까? 중간세계를 구하고 돌아온 프로도에게도 모르도르 산까지의 긴 여정이 단지 본인을 한 꺼풀 벗겨낸 성장기로써 기억될까? 수년의 시간이 흐르고도 아직까지 선명한 기억들. 비가피트에서 돌아오며 내 몸에 닿아 부서지던 빗줄기도, 발바닥에 닿던 올랑고 섬의 따뜻한 모래 바닥도, 바람과 별과 지평선 밖에 보이지 않던 고비 사막의 황홀한 정경도 내 인생의 다음 챕터를 위한 프리퀄 이었을까.


나는 감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경험과 순간들은 단지 성장을 위함이 아니다. 내 인생의 경험들로부터 내가 얻은 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성장은 단지 부수적인 혜택이었을 뿐, 경험은 그 자체로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성분이 되었다. 만약 나를 변화시켰던 그 순간들이 단지 다음 단계를 위한 성장통일 따름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시간이 역설적으로 그 때의 나에겐 얼마나 무의미했을까. 잡스의 수많은 연설 중 유일하게 나를 가장 고무 시켰던 문장인 'journey is the reward' 는 사실 인생여정 중 얻어지는 것들이 남은 생애 속에서 의외의 역할로 빛을 발할지 모른다는 의미였지만, 반대로 나는 journey를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이 목적지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단 뜻으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여정은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한 이동이나 방황이 아니라 모든 순간순간이 각기 다른 주파수로 빛나는 시간들이었다.

냉정히 말해 인간은 결국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존재다.

그런 인간의 삶 마지막에는 어떤 것이 남을 까. 세간은 아마 그가 일생을 통해 이룩한 것. 다른 이들에게 준 영향과 남긴 유무형의 것들을 통해 그의 인생을 정의할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도 통용되는 이야기는 아닐지 모른다. 자전적으로 정의 되는 것은 결국 그의 일생 동안 어떤 경험을 해왔는가 일 것이다. 때로는 추억이 되고 순간이 되는 것. 결국 지금 시점의 나에게 경험은 이런 정의로 남는다.


'오롯이 나에게, 내 인생을 정의 하고 완성하기 위해 모아 나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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