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키워드로 쓰는 아무 글#4 '표현'
#1
재즈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상대방과의 호흡? 화합?
아니? 샤빱 두비두밥~
난 아직도 간결한 표현의 정수를 생각하면 이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사실, 이 문답은 이제는 쉽사리 언급하기 어려워진 그가 즉석에서 떠올린 것은 아니고 1976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저명한 재즈싱어 두 사람이 보여주었던 막간극이었다. 물론 2020년대의 우리에게 와 닿게 해준 건 그가 어느 유튜브에서 즉흥적으로 플레이해 낸 재기발랄한 쇼츠 였지만.
그는 오랜 만화가 생활을 했고 어마어마하게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내게 가장 큰 감동과 여운을 줬던 만화는 '짬'이라는 50화짜리 자전적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본인의 군 생활을 큰 가감 없이 담담하게 서술하는데, 그 소회가 내 인생의 2년여를 보내는 데 적잖이 큰 역할을 했다. 나는 그의 못나고 어색한 그림체에도 불구하고 그의 만화가로서의 장점은 표현력이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직도 간혹 책장에 그 만화책이 보일 때면 다시금 휘리릭 들춰보며 오랜 감상에 젖곤 한다. 최근에는 취기에 오른 채 누워 부단히 쇼츠를 내리다가 마주한 1분짜리 뮤지컬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오롯이 1분짜리 멜로디만으로 세계관을 구축한 그 채널은 너무나도 훌륭히 PTSD와 추억이 겹쳐진 그 애매한 세월을 달래준다. '짬'이 50화에 걸쳐 감성의 여정을 차곡차곡 쌓아왔다면, 현대인의 짧은 집중력에 맞춰 탄생한 이 콘텐츠는 몹시 집약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선율로 정확한 포인트를 타격하는 법을 알고 있다. 세상에는 하나의 주제를 수많은 표현으로 풀어놓은 유희 거리들이 넘실대고 있고, 이로써 우리 삶은 더더욱 풍요로워진다.
#2
그래서 표현 이야기를 할 때면 문득 오래도록 표현하지 못한 존재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오랜 세월 점점 색이 옅어져 가다가 드디어 조금, 이미지가 달라져 버린, 이전 시대의 아버지들이다.
'디어 마이 프렌즈'의 석균(신구 분)은 자신이 다니는 공장장의 아들이 딸을 성희롱했음을 알고도 침묵한다. 울면서 하소연하는 딸에게는 그저 윽박지를 뿐이다. 결국, 둘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골이 생겨버리고,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간다. 사실 석균은 아버지의 도리를 다했었다. 딸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공장장의 아들을 죽을 만큼 팼고 그 일로 직장을 잃기까지 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은 조카가 왜 그 말을, 그 마음을 전하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석균은 말한다. 자신은 '그 시대 남자들이 다 그랬듯' 자식에게 미안하단 말을 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권리를 얻지 못한 억압받던 여성처럼, 가장 강한 권력으로 사회와 집안에서 군림하던 그들도 표현하는 법을 거세당한 채 긴긴 세월을 살아왔다. 나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이자 그 시대 남자로 살아왔고 마찬가지의 공정과정으로 만들어진 프로토타입 같은 사람이었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가 말하고자 했으나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나는 이제 그 혹독했던 긴 세월이 지나가고 누구든 표현할 자유가 있고, 누구든 표현함이 부끄럽지 않은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느낀다.
#3
다소 두서없이 써오던 글의 완고를 앞둔 지금, 나는 마찬가지로 방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한 축생을 바라본다. 오롯이 내 욕심에 의해 나와 함께 기거하게 된 저 작은 미물은 참으로 내게 표현하고픈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태초부터 벌어져 있던, 긴 세월 부단한 노력에도 그리 가까워지지 않은, 그와 나 사이에 놓여진 긴 골짜기로 인해 우리의 울음소리는 서로 엇갈린다. 그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만의 표현 방식으로, 그저 꿈뻑꿈뻑 졸다가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다가, 그르릉거리며 바닥을 뒹굴다가, 간혹 달려와 몸을 부딪치고 갈 뿐, 지금껏 먹어본 것 중엔 무엇이 맛있었고, 어디에 가보고 싶은지, 무엇을 보고 싶은지 주창하지 못하고. 내일은 내가 또 언제 떠나 언제 들어오는지, 본인이 나를 그리워하는 만큼 나도 자신을 그리워하는지, 원래 생이란 그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 맞는지. 내게 따져 묻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