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어진 키워드로 쓰는 아무 글#2 '튀다'

by Igloo of Aningaaq

主客顚倒


악명높은 애니메이션 ‘사우스파크’의 악동(이라고 쓰지만 극우 악마에 가까운) 캐릭터인 에릭 카트먼은 어느 날 놀러간 수영장이 히스패닉과 기타 이민자 가족들로 가득 찬 것을 보고 경악한 나머지, 친구에게 달려가 절규한다.

"우리 주변에 소수자들(minorities)이 너무 많아! 이 수영장을 가득 메워 버렸어! 심지어 우리보다도 많다니깐?"

친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니 말대로 걔네가 그렇게 많다면, 걔네가 왜 소수자냐?"


많은 이들이 PC주의에 대한 피로를 호소하는 요즘이다. 무지성적 다양성의 추구, 이를 테면 사회적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은 쿼터 제나 패션으로 소비되는 배타적인 선민의식 등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최근 무리한 캐스팅으로 이슈가 되었던 인어공주의 제작, 개봉은 반PC주의자들의 이러한 거부감이 응축되어 폭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내 생각에 PC주의가 이토록 우당탕탕 부딪히면서도 세를 넓혀 가는 것은 결국 전 세계의 인구 구성 변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들이 단순히 선민의식에 빠져있는 바보들은 아닐 것이다. 다만 변화하는 시장에 한 박자 빠른 타이밍에 무리하게 진입한 아둔함을 보였을 뿐이다.


矗石逢釘


기안84는 공감대를 짚어내는 유형의 예능캐릭터가 아니다. 그는 언제나 예상 밖의 행동을 하며 때로는 상상하기 힘든 비 위생으로 경악을, 때로는 나이에 맞지 않는 어이없는 순수함으로 너털웃음을 짓게 하는 이다. 이런 캐릭터가 2023년 가장 우리를 웃기고 울린 연예인이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다양함이 난립하는 이 예능 판에서도 그는 여러모로 '튀는' 면모를 보여준다. 기안84는 창작에 의해 극화된 캐릭터가 아니라 인간 김희민 그 자체로서 리얼리티 예능들을 종횡무진 한다. 이 점은 기안84의 캐릭터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놀랍게도 슬픈 지점이기도 하다. 그의 주변인들이 사랑과 함께 보내는 묘한 무시와 가벼운 조소조차도 사실은 진심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창조하고 연기해 내는 똑똑한 코미디언이 아니라, 정말로 여느 사람들과 다르게 ‘튀’는 사람이니까


흔히 차별과 멸시는 '튀는' 데서 온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알지 못하는 위협이었기에, 사회의 통일성을 저해하며, 공고히 자리 잡은 우리의 공동체를 무너뜨릴 것 같은 공포감을 준다. 근대화와 세계화가 한 세기 넘게 진행 된 한국에서의 혐오는 고대 동양적 사회관과는 다른 측면이 있겠지만 여전히 획일적인 추구가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경직된 양상이 느껴진다. 90년대와 00년대의 우리사회가 그러한 점을 경계하며, 개성과 자유를 추구하는 역 발산 중이었다면 요즘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반pc적인 흐름이 위선을 넘어 위악처럼 우리 사회를 휘감고 있다.


累卵之危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기어이 당면했다. 2024년 기점으로 대한민국 내 외국인 비율은 5%를 넘어가며 다민족 국가로 분류되었다. 물론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에겐 체감이 부족 할지 모르지만, 이는 오히려 소멸되어가던 지방과 농촌의 약진을 의미한다. 놀라운 점은 지금의 이 성적표가 20년 전에 본 시험에 대한 결과란 점이다. 출산율은 그 출산 인구가 실질적인 생산/소비인구가 되는 20 여년 이후에야 비로소 사회적인 여파를 뿜어낸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20년 그리고 그 이후까지의 사회양상을 예측하는 것은 '예측 한다'는 동사로 표현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그리고 이토록 자명한 미래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충돌을 마주하게 될는지 유추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다.

전후 한국사회에서는 혼혈인을 멸시하며 '튀기'라고 불렀다. 이 단어의 어원이 '튀다' 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단일민족의 신화를 숭배하던 우리에게 혼혈인들의 존재가 주는 공포감과 거부감도 결국 그들이 '튀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포용력과 지성은 그때로 부터 얼마나 개선되었을까.


克世拓道


나는 이러한 갈등에 대한 해결책으로 인류애와 사랑을 종용할 생각이 없다. 이것은 혐오와 싸우는 진실 된 방법일지언정, 똑똑한 방법은 아니다. 나는 이민자들을 경계하고 몰아내려는 우리가 그저 원주민일 따름이며 더 이상 이 땅과 역사의 주인으로서 갑 질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얘기한다. 우리가 빚어낸 출산율의 가파른 기울기는 결국 우리의 빠른 이해를 도울 것이다. 우리는 더딜 틈 없이 짧게 아프고 금새 적응해 나갈 것이다.

만약 아직 잘 모르겠다면 동쪽의 대양을 건너 마주하게 되는 그 거대한 나라를 생각해보자. 20세기 이후의 이민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남아있는 인종간의 격차와 이민자들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끊임없는 갈등과 극우적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 곳에서 긴긴 세월 역사를 써내려온 이들의 현재를 얘기한 것이다. 원래 그 땅의 주인 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용한지. 그 곳의 '표준'이 바뀌는데 얼마나 짧은 시간이 걸렸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나는 우리사회의 미래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전망하고 있다, 집단과 다른 기존의 질서는 더 이상 질서가 아니게 되고, 눈에 뛰던 돌출과 변곡점들이 새로이 덧칠 될 것이다. 정을 내려칠 곳 없을 만큼 많은 돌들이 모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결국 새로운 질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번 바뀌는 집단과 사회의 성격 속에, 결국 '튄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래서 나는 소수자들을 차별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이 말을 하게 될 순간을 예상해보곤 한다. 조금은 통쾌하게 그리고 조금은 슬프고 처연하게.


"자 이제 누가 소수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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