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ingaaq Travel#2
전역을 하자마자 학교 앞 식당에서 서빙을 했다.
홍복이와의 상해 여행은 군 생활을 하는 동안에 틈틈이 작성하던 버킷리스트의 가장 첫 장에 있던 항목이었다. 일평생 가장 자신감이 넘친다는 바로 그 시기였고 나의 첫 배낭여행이었다.
당연히 그 비용은 내 손으로 마련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군인처럼 묵묵히 한 학기를 꼬박 매진했다. 그러니 마침내 그 겨울, 황푸 강을 마주했을 때. 그 강변의 고풍스런 건물들과, 건너편의 빛나는 마천루들을 바라봤을 때 내 마음이 어땠겠는가.
이미 어엿한 베테랑 여행가였단 홍복이와 함께였기에, 여행은 대부분 순조로웠다. 매순간이 흥분과 성취감의 연속이었고 앞서 말한 황푸강의 야경 속을 거닐던 그 시간은 향후 몇 년간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될 만한 일이었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좁디좁은 병영에 갇혀, 주는 밥 먹고 시키는 것만 하던 신세였는데, 지금은 내 힘으로 바다를 건너와 휘황찬란한 고층건물들에 둘러 싸여 있으니 그 간극이 주는 감정이 큰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우린 매일 한국 돈으로 500원 가량 하는 맥주 한 캔 씩을 사서 홀짝거리며 도심을 거닐었고 강가 외에도 인민광장이나 루쉰 공원, 신천지 같은 곳들을 부지런히 방랑했다. 어느 정도 상해라는 도시의 이름난 명소들을 볼 만큼 둘러봤다 싶었을 즈음에, 상해를 떠나 근처의 마을들을 돌아보기로 했는데 그 첫 번째가 시탕이었다.
헐리우드 영화를 찍는 바람에 유명세를 치르게 된 이 마을은 급격히 관광지화 되는 중이었지만, 아직까진 여전히 전통적인 삶의 방식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가느다란 골목길 사이로 하늘이 길게 뻗어있고 하천을 따라 군것질 거리를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서있는 마을이었다. 두세 시간이면 구석구석까지 돌아 볼 수 있는 작은 마을이라 하룻밤만 머물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는데 다음 행선지에 대한 의견이 살짝 갈렸다. 시탕에 크게 감명 받은 홍복이는 마찬가지로 작고 예쁜 ‘통리’를 가고 싶어 했고, 나는 전통 건축물들이 많았던 쑤저우를 탐냈다. 좁히지 못할 만한 간극은 아니었지만 첫 배낭여행의 뿌듯함에 취해있던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각기 원하는 곳을 돌아보고 3일 뒤 항저우에서 다시 만나기를 제안했다. 2주 내내 홍복이를 졸졸 따라다녔으니 이 시기쯤 나 혼자 개척해 나가는 여행경험을 갖고 싶었다. 아직 스마트폰을 쓰던 시기가 아니었고 우리는 한 통에 200원이나 하던 국제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아야했기에, 만날 장소와 시간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정해두고 우리는 각자의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아무래도 해외에서 혼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라 조금은 긴장하고 있었지만 스무 살 때부터 뻔질나게 세계 곳곳을 누벼보았던 홍복이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무 걱정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쑤저우는 대도시니까 교통편이나 편이시설도 잘 되 있고 시탕에 비해 영어도 잘 통할 거라는 이유였다.
그렇게 두근두근한 마음을 안고 출발한 첫 여정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살짝 씩 덜컹거렸다. 성조가 있는 탓인지 쑤저우라는 나의 발음을 이해하지 못한 매표소 직원에게 노래를 부르듯이 네다섯 번씩 음을 바꿔가며 외쳐야 했고, 별도의 영어안내판이 없었기에 지도에 있던 한문 ‘소주’의 형상을 겨우 맞추어 버스를 찾아냈다. 운전기사도 마찬가지로 아주 간단한 영어조차 통하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경유하는 곳 없는 직행이었기에 탑승 후에는 초조함 없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버스에서는 옆자리에 앉은 시골청년이 반가워하며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는데, 내가 간단한 중국어조차 못한다는 걸 깨닫고서 조용해졌다. 그의 어색한 침묵 속에 긴 시간을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나서야 쑤저우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길을 물어가며 숙소에 도착했을 때쯤엔 옅은 멀미와 여독에 절여져 있었고 이미 해가 진 이후였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날이 밝은 지 한참이 지나서야 눈을 떴다. 전통 가옥형태를 본 뜬 게스트하우스는 ㄷ자 형태의 마당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양치라도 할까 해서 나왔는데 오른쪽에 세워진 가벽 뒤쪽이 한참 부산하였다. 무슨 일 있나 하고 슬쩍 그쪽을 들여 봤더니 한 무리의 백인 여자들이 세수를 하고 있었다. 금남禁男의 구역인가 싶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려는데 그 무리 속에 있던 유일한 동양인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당황한 나를 보더니 괜찮다며 싱긋 미소지어주었다. 대단히 친절하면서도 동시에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미소였다. 놀란 와중에도 그 장면이 찰칵하고 인상에 박혔다.
세안을 마치고 그날의 일정을 위해 리셉션에서 쑤저우의 관광안내서를 받아 로비에서 읽었다. 여행 분위기에 취해 즉흥적으로 정한 행선지였기에 아는 바가 없었다. 펜을 들고 하나 둘 체크해 가며 사원과 고 건축물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는데 나와 똑같은 처지인 걸로 보이는 여행자 하나가 옆 테이블에 앉아 지도를 뒤지고 있었다. 아침에 본 그 미소의 주인이었다.
그날은 혼자 여행을 시작한 지 두 번째 날이었던 터라 이 기조를 유지할지 아주 잠시 동안 망설였지만, 이것 또한 혼자 하는 여행의 일환이 아니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 이내 말을 붙였다. 혹시 북사탑이나 사자림을 갈 생각이냐고. 그렇다면 혹시 같이 가지 않겠냐고. 예상대로 별다른 계획이 없었던 그녀는 생각보다 흔쾌히 제의를 승낙했다. 각자의 방에서 30분의 짧은 준비시간을 가진 후 다시 만난 우리는 함께 길을 나섰다.
쑤저우는 시탕과 마찬가지로 수향水鄕이었다. 여러 갈래의 하천을 따라 자리 잡은 마을이었고 결코 가난한 마을이 아니었기에 물가를 따라 경관이 좋은 산책로를 잘 조성해 두었다. 마침 사자림은 그 하천의 끝부분에 자리하고 있어, 우리는 한 시간 넘는 거리를 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C는 홍콩인 유학생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런던에 살고 있는 홍콩 출신 이민자2세였고, 북경에서 공부를 마친 후 졸업을 앞두고 중국의 도시들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사자림에 입장하기 전 점심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특히 한국의 정치에 대해 궁금해 했다. 마침 당시의 나는 유례없이 정치에 관심이 높은 시기였기에 꽤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며 한껏 의식 있는 대학생인척 할 수 있었는데, 당연하단 듯이 영어실력이 발목을 잡았다. 실제로 이야기의 중간 쯤 그녀가 진지한 사상적 질문 하나를 던졌을 때, 나는 사실 질문을 전혀 해석하지 못해 그저 그 주제에 대해선 관심이 없는 척 어물쩍 넘어가야만 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에 대해 가진 내 감정은 호기심과 흥미 정도였다. 타지에서 경험하는 친절함은 꽤나 호감으로 작용하긴 했지만 당시의 나는 마음속에 굉장히 강력한 방어기재를 갖고 있었다. 그건 이전 여자 친구가 심어두고 간 트라우마 이기도 했고 전역 후에 복학생들이 흔히 보여 주는 행태들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이를 테면 나는 여자만 보면 눈이 뒤집히는 예비역들과는 다른 점잖은 남자라는 자신감과, 별 거 아닌 행동에 쉽게 흔들리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심이 섞여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식사의 말미에 C가 자신이 먹던 빵을 조금 떼서 입에 넣어 줬을 때, 마음의 외벽이 콰직. 하고 균열을 일으키더니 삐-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사자림은 물과 숲이 어우러진 넓은 정원을 가진 사원인데, 동양 전통 건축의 다양한 특징들을 많이 지니고 있어서 얘기할 거리가 많았다. 복학을 대비해 틈틈이 읽어두었던 건축교양서적들이 큰 빛을 발했던 것이다. 건축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 금방 옮겨 붙었고, 사회, 교육, 개인사 등으로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우리는 사원을 둘러본 게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 속을 거닐고 온 셈이었다.
다음 행선지였던 북사탑에 오르면서도 나의 아는 척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고작 2학년에 불과했던 내가 책 몇 권 읽은 바탕으로 떠들 수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최대한 그럴듯하게 늘어놓았고, 그녀의 부전공이 동양건축학 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에야 조용해 졌다. 다행히 북사탑은 끊임없는 계단으로 이루어진 높은 탑이었기에 차오르는 숨으로 당황한 표정과 빨개진 볼을 숨길 수 있었다. 겨울이라 해가 짧았고, 또 생각보다 느긋하게 걸었기에, 우리가 탑의 꼭대기 층에 도달했을 때엔 슬그머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북사탑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아름다웠기보단 감개무량했던 감정으로 기억한다. 사실 계속되는 성취에 따른 만능감은 그 여행 전체를 관통하는 감성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길에서 사온 간식거리와 함께 로비에 앉아 하루를 마무리하는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거기서 C의 지난 4년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스무 살의 그녀는 홀홀단신으로 북경에 넘어왔다. 런던에도, 홍콩에도 좋은 대학들은 많았지만 그녀는 동양사에 대한 확고한 목표의식이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뿌리국가에 대한 호기심도 컸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도전적인 사람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곳에서 20대를 시작하고 싶었다. 처음 유학을 왔을 때 그녀는 북경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캠퍼스만 벗어나면 생각보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았다. 들어야 했던 수업의 절반 이상이 북경어였고 겉모습은 똑같았던 학우들에겐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 힘들고 고독한 새내기 생활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피나는 노력 끝에 3개 국어에 통달했고 주전공과 부전공에서 매학기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방학 때마다 틈틈이 중국 곳곳을 여행했다. 4년 동안 개인적인 문제로 짧게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런던은 물론, 친척들이 사는 홍콩에도 들른 적이 없다고 했다. 유학생활은 항상 힘든 순간들이었기에 조금이라도 익숙한 곳에 가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것 같아서였다. 그 긴긴 4년의 밤들을 넘어 이제 귀국 전 마지막 여행을 하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그녀에 대한 감정이 관심이나 호감을 넘어 동경에 이르렀음을 느꼈다.
다음날 아침, 숙소의 식당에 앉아 아주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는 창밖의 눈을 바라보며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그녀가 다음 행선지로 떠나는 날이었다. 기차역까지 배웅하려는 나를 만류하여 우리는 처음 마주쳤던 그 ㄷ자의 마당에서 헤어졌다. 형식적으로 메일주소를 주고받았지만, 사실은 아무 의미도 없단 걸 알고 있었다.
그녀와 헤어지곤 많은 것들이 아쉬워 졌다. 식사자리에서 있었던 자잘한 실수들. 조금은 남루했던 나의 행색들. 대화중에 있었던 크고 작은 버벅거림들. 더 많은 이야기들을 가로막았던 영어실력. 그 모든 것들이 그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회한으로 다가왔지만, 결국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는 것들이었다. 우리는 지구 반 바퀴만큼 떨어진 곳에서 살아가다가 단 하루 마주쳤을 뿐이었다, 각자의 삶은 공고했고 또 너무 달라, 앞으로의 접점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니 딱 그 정도가 좋았다. 나의 첫 여행에 마주쳤던 짧은 동행. C에 대한 기억은 그 정도만으로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