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이 맞다면 런던에 다시 온 게 꼭 15년 만이다.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고, 내 생애 첫 여권을 만들었고, 한 달 유럽 여행의 서막을 바로 여기 런던에서 열었다. 홍대 근처 여행사를 통해 예약한 상품은 호텔팩 상품으로 여행 자체는 자유여행이나 숙소는 지정되어있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기억을 안고 갈 거라는 여행사의 전략이었는지 나라를 옮겨갈수록 숙소가 점점 좋아졌는데 그 탓에 첫 여행지의 런던 숙소는 꽤나 심난한 곳이었다. (지금의 런던 물가를 고려해보면 그 호텔팩 가격에 어쩔 수 없는 결과인 것도 같다) 여하튼 15년 전 일이지만 런던의 숙소만큼은 잊히지가 않는다. 2층 침대가 놓인 6인실이었고, 3칸짜리의 공동샤워장과 공동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30대인 지금은 엄두조차 안 날 상황이지만, 말 그대로 배낭여행객이었던 20대의 나에게는 감당할 수 있는, 감당해야 하는 불편함이었다.
아무래도 첫 방문으로부터 상당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온 런던이라 그런 걸까. 여행 중 나도 모르게 계속 그 시절과 비교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때도 이렇게나 시차 적응을 못했을까. (당시에는 홍삼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리도 새벽부터 잘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고작 일주일에도 이것저것 달고 온 짐이 한가득인데 어떻게 그땐 배낭 하나로 한 달을 버텼을까. 등등
언제 다시 유럽에 올까 하는 마음에 하나라도 더 보려고 애썼던 그때, 살인적인 뽕 뽑기 스케줄을 소화했던 20대에 비하면 상당히 게으른 여행자가 돼버린 지금. 이런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나이 들면서 약해진 체력이 날 바꾸었고, 돈을 쓰는 학생이 아닌 돈을 버는 직장인이라는 게 날 바꾸었고, 주어진 시간 안에서 무엇을 선택할 지에 대한 가치가 바뀌었고, 15년이란 세월 동안 알게 모르게 나만의 취향이란 것도 생기었다.
결혼과 출산이라는 굵직한 사건들과는 거리가 먼 어른으로 살면서 나의 신변 변화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길이 도통 없었는데, 어쩌면 성장이고 어쩌면 변화일지 모르는 나의 무언가를 이번 여행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런던에 도착한 첫날 먹은 저녁도 맛집 투어가 아닌 숙소에서 '가까우면서' 평점 높은 '폴란드' 음식이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의 성공이었고 그 맛과 분위기에 반해 런던을 떠나기 전 한 번 더 갈 생각이다.
워밍업을 끝내고 본격적인 런던 여행을 시작하는 아침, 런던아이 주변의 작은 공원을 지나고 있었다. 비둘기 떼들이 점령을 하고 있었고, 청설모 몇 마리가 벤치에 앉은 사람들의 어깨며 무릎 위를 올라타고 있었다. 각종 조류와 쥐가 섞인 동물 모조리를 극히 싫어하는 나로서는 기겁할 장면이었다.
그리고 15년 전 런던. 샌드위치 하나 옆에 차고 공원에서 허세 부리려 했던 어떤 아침이 떠올랐다. 샌드위치 냄새 맡고 내 어깨 직전까지 왔던 청설모 덕에 그 고요한 공원에서 꺄악 비명을 지르고 수중에 있던 것을 다 버리고 도망치느라 가방 속 짐이 우르르 쏟아졌던 아침이었다. 샌드위치가 바닥에 떨어지자 그 청설모는 더더욱 내 주변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나는 무서움에 떨면서 떨어진 소지품 단 하나를 챙기지 못한 채 망연자실하고 서 있었다.
그때 한 영국 학생이 다가와서 you don't have to be afraid 하면서 쏟아진 내 짐들을 전부 주워 가방에 넣어주었다. (혼이 나간 와중에도) 고마운 마음에 갖고 있던 하회탈 열쇠고리를 선물로 내밀었다. 그때서야 나를 구해준 영국 신사의 얼굴을 봤는데 행동만큼 얼굴도 훈훈한 (그 당시 내 또래) 학생이었다. 괜스레 수줍어져 어느 정도 그와 거리가 떨어지고 나서 거울을 꺼내 내 상태를 체크했는데 상당한 거지꼴이라 청설모 봤을 때만큼의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어쨌든 내가 15년 전 런던 여행에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가장 흐뭇하고도 아름다운 추억이었는데 청설모를 보는 바람에 15년 만에 소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