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한 발짝 아니 몇 발짝 떨어지고 싶어 떠나온 여행인데 이내 삶은 여행이고 여행이 곧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간과 장소의 차이가 지대해서 두 가지가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가 터져나가는 짐을 몇 번씩 풀었다 쌌다 하면서 여행지까지 따라온 내 일상 모습이 확 오버랩되었다.
집이든 밖이든, 오래 머물든 적게 머물든 나란 인간은 왜 이렇게 많은 짐을 양산해낼까. 이런 나의 캐릭터, 캐리어 가득 담긴 나의 짐들이 참 성가시게 느껴졌다.
입사하고 처음 떠난 해외여행에서 나는 버리기 일보직전의 옷들과 신발들을 몽땅 싸갔었다. 다 버리고 새로운 아이템들을 채워온다는 뭐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여행을 갔다 오고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고 나서 전부 버릴 아이템들만 가져가면 여행 사진을 건질 수가 없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사진용 아이템들과 버려야 마땅할 아이템들을 적절히 섞어서 짐을 싸고 있다. 사는 속도에 비해 버리는 속도가 심하게 더딘 내가 이렇게 짐을 싸서 여행을 가면 미련 없이 꽤 많은 걸 버리고 온다.
이번 더블린, 런던 여행에서도 신발 두 켤레, 롱 점퍼, 반팔 티셔츠, 맨투맨 티셔츠, 바지, 양말 및 속옷 상당수를 끝까지 알뜰히 입고 모조리 버리고 왔다. 화장을 잘 고치지 않아 너무 오랜 시간 사용한 화장품 몇 가지도 덤으로 싹 버리고 왔다.
예전에 여행을 같이 갔던 회사 동료가 무섭게 물건을 버리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적이 있었다. 나조차도 참 신기한 부분인데 평소 집에서는 잘 못 버리는 물건들을 희한하게 여행지에서는 엄청 칼같이 버리고 오게 된다.
비워진 캐리어들은 나와 가족, 친구들을 위한 선물들로 금세 가득 찼다. 단출해지고 싶어서 물건을 버린 게 너무 금방 소용없게 됐지만 이번에는 버려서 해방된 기분을 똑똑히 기억하여 집에 돌아오자마자 방정리부터했다.
미니멀 라이프는 아직 나에게 멀고 먼 고난도의 라이프스타일. 하지만 이제부터 복잡하고 성가신건 그때그때 버리기로 결심했다. 물건을 끼고 있는 거 자체가 상당한 에너지가 소요되는 일임을 이번 여행에서 확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 런던 여행의 마지막 코스가 노팅힐의 포토벨로 마켓인 건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특히나 이런 류의 상점을 구경하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고, 늘 가랑비 젖는 쇼핑으로 큰돈 나가는 나에게 정말 버티기 힘든 코스였다. 그래도 가까스로 참아내 몇 가지 아이템으로 스스로와 합의 봤는데 다음에는 작정하고 여기서 앤티크 소품들과 빈티지 제품들을 쇼핑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한창 물건에 눈이 팔리다가 당도한 곳은 영화 노팅힐의 서점이었다. 영화 본지가 하도 오래돼서 그 서점이 이랬나 싶었다. 내 기억 속 서점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언덕 위에 있었는데 아주 평평한 평지에 있어서 내가 영화를 보긴 본건가 혼란스러웠다. 사실 영화 스토리는 거의 기억이 안 나서, 결혼식 신부 입장곡으로 열에 아홉은 나오는 그 유명한 노래 she를 흥얼거리며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서점 안을 구경했다. 서점이 예뻐서인가 비치되어 있는 책들도 예쁘단 생각이 들었다. 기념으로 책을 한 권 살까 했지만, 이미 터져나가는 캐리어를 떠올리며 자석과 나무엽서로 대신했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던 이 날은 참으로 영국답게 흐리고 비가 와서 더 기억에 남았다. 구경을 마무리하면서 따뜻한 tea와 스콘을 먹었는데 그 맛도 참 꿀맛이었다.
지금도 나는 계속해서 내 방과 내 주변을 정리 중이다.
지금보다 훨씬 많이 단출해질 때쯤, 단출한 라이프 스타일에 적응이 될 때쯤 텅텅 빈 캐리어를 들고 꼭, 다시 노팅힐을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