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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Oct 16. 2019

런던 노팅힐, 안 사고는 못 배기는



일상에서 한 발짝 아니 몇 발짝 떨어지고 싶어 떠나온 여행인데 이내 삶은 여행이고 여행이 곧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간과 장소의 차이가 지대해서 두 가지가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가 터져나가는 짐을 몇 번씩 풀었다 쌌다 하면서 여행지까지 따라온 내 일상 모습이 확 오버랩되었다.

집이든 밖이든, 오래 머물든 적게 머물든 나란 인간은 왜 이렇게 많은 짐을 양산해낼까. 이런 나의 캐릭터, 캐리어 가득 담긴 나의 짐들이 참 성가시게 느껴졌다.





입사하고 처음 떠난 해외여행에서 나는 버리기 일보직전의 옷들과 신발들을 몽땅 싸갔었다. 다 버리고 새로운 아이템들을 채워온다는 뭐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여행을 갔다 오고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고 나서 전부 버릴 아이템들만 가져가면 여행 사진을 건질 수가 없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사진용 아이템들과 버려야 마땅할 아이템들을 적절히 섞어서 짐을 싸고 있다. 사는 속도에 비해 버리는 속도가 심하게 더딘 내가 이렇게 짐을 싸서 여행을 가면 미련 없이 꽤 많은 걸 버리고 온다.

이번 더블린, 런던 여행에서도 신발 두 켤레, 롱 점퍼, 반팔 티셔츠, 맨투맨 티셔츠, 바지, 양말 및 속옷 상당수를 끝까지 알뜰히 입고 모조리 버리고 왔다. 화장을 잘 고치지 않아 너무 오랜 시간 사용한 화장품 몇 가지도 덤으로 싹 버리고 왔다.

예전에 여행을 같이 갔던 회사 동료가 무섭게 물건을 버리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적이 있었다. 나조차도 참 신기한 부분인데 평소 집에서는 잘 못 버리는 물건들을 희한하게 여행지에서는 엄청 칼같이 버리고 오게 된다.

비워진 캐리어들은 나와 가족, 친구들을 위한 선물들로 금세 가득 찼다. 단출해지고 싶어서 물건을 버린 게 너무 금방 소용없게 됐지만 이번에는 버려서 해방된 기분을 똑똑히 기억하여 집에 돌아오자마자 방정리부터했다.

미니멀 라이프는 아직 나에게 멀고 먼 고난도의 라이프스타일. 하지만 이제부터 복잡하고 성가신건 그때그때 버리기로 결심했다. 물건을 끼고 있는 거 자체가 상당한 에너지가 소요되는 일임을 이번 여행에서 확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 런던 여행의 마지막 코스가 노팅힐의 포토벨로 마켓인 건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특히나 이런 류의 상점을 구경하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고, 늘 가랑비 젖는 쇼핑으로 큰돈 나가는 나에게  정말 버티기 힘든 코스였다. 그래도 가까스로 참아내  몇 가지 아이템으로 스스로와 합의 봤는데 다음에는 작정하고 여기서 앤티크 소품들과 빈티지 제품들을 쇼핑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한창 물건에 눈이 팔리다가 당도한 곳은 영화 노팅힐의  서점이었다. 영화 본지가 하도 오래돼서 서점이 이랬나 싶었다. 내 기억 속 서점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언덕 위에 있었는데 아주 평평한 평지에 있어서 내가 영화를 보긴 본건가 혼란스러웠다. 사실 영화 스토리는 거의 기억이 안 나, 결혼식 신부 입장곡으로 열에 아홉은 나오는 그 유명한 노래 she를 흥얼거리며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서점 안을 구경했다. 서점이 예뻐서인가 비치되어 있는 책들도  예쁘단 생각이 들었다. 기념으로 책을 한 권 살까 했지만, 이미 터져나가는 캐리어를 떠올리며 자석과 나무엽서로 대신했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던 이 날은 참으로 영국답게 흐리고 비가 와서 더 기억에 남았다. 구경을 마무리하면서 따뜻한 tea와 스콘을 먹었는데 그 맛도 참 꿀맛이었다.





지금도 나는 계속해서 방과 내 주변을 정리 중이다.


지금보다 훨씬 많이 단출해질 때쯤, 단출한 라이프 스타일에 적응이 될 때쯤 텅텅 빈 캐리어를 들고 꼭, 다시 노팅힐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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