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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Aug 20. 2019

문경새재, 무기력과의 작별



지독하게 무기력한 8월이었다. 유독 더위에 맥을 못 추는 걸 감안하더라도 좀 심하다 싶을 정도였다. 매일 아침 알람을 맞추고 자도 못 일어나기 일쑤고, 그렇게 좋아하던 글에도 집중하기가 힘든 나날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해는 가을에 긴 휴가를 가는 탓에 특별한 나들이 없이
여름을 버티고 있었다.

 무기력한 나를 더 이상 방치할 수가 없어 저번 주 금요일, 퇴근하고 친한 동생과 함께 문경으로 떠났다. 언제 어디로 출발하자는 것만 정해놓고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다. 굳이 나누자면 동생이나 나나 여행을 떠나기 전 계획을 하고 움직이는 유형들인데 이번만큼은 그야말로 그냥 떠났다.





 문경에 도착해서 우리는 일단 하룻밤 잘 숙소를 정해야 했다. 어디든 터미널 근처로 가면 잘 곳이 있지 않을까 싶어 그쪽을 서성였더니 역시 그 근처에 숙소들이 뭉쳐 있었다.

다 비슷해 보였지만 합리적인 논의 끝에 외관상 괜찮아 보이는 곳을 선택해서 들어갔다.  다소 낯설고 어색한 시스템의 숙소였지만 하루 자기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무작정 온 것 치고는 선방인 출발이었다.





 도착했을 때는 밤이라 전혀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둘러보니 숙소 근처 경관이 그냥 떠나기 아쉬워 잠시 산책을 했다. 둘 다 뉴질랜드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거의 동시에 우와 뉴질랜드에 온 것 같아를 연발하면서 셔터를 눌러댔다. 문경에서 맞이하는 아침부터 왠지 느낌이 좋았다.





 몇 년 전, 회사 워크숍으로 문경에 다가  문경새재를 가 본 적이 있었다. 흐릿하지만 분명 좋았던 기억이었다. 마침 같이 간 동생이 그곳에 한 번도 못 가봤다고 하여 문경새재로 향했다. 유명한 관광지인 건 알고 있었지만 아침부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상했는데 맨발 걷기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그 행사에 참여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내게 '좋았던'기억을 줬던 문경새재의 관문은 입구에서 가까운 1 관문이었다. (얼마 안 걸었던 건 용케 기억이 나서) 문경새재에서 예쁜 사진을 찍어보자는 일념으로 나름대로 치장을 하고 간 우리였다. 그런데 우리가 간 날 하필 그 장소가 공사 중이었고 그 덕에 나의 왜곡된 기억에 시동이 걸렸다. 나는 동생에게 좀만 더 걸으면 그곳이 나올 거라고 큰소리를 뻥뻥 치며 하염없이 걸었다.

진작에 지나친 1 관문은 공사 중이라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처음 문경새재에  가 본) 동생에게 멋진 곳을 보여준다는 일념으로 걷고 또 걸었다.
 

 고운 흙길을 맨발로 걸으려고 일발 장전하고 온 분들 사이에서 핸드백과 카메라를 든 우리는 참 튀는 존재들이었다. 신발이라도 편한 동생과 달리 특히 나는 (굽은 낮지만) 샌들을 신고 있어서 더 가관이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게 아까워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며 두 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제3관문을 보고 나서야 나는 망연자실했다. 내가 좋았다고 기억한 장소는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던, 입구에서 멀지 않은 1 관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샌들을 신고 몇 키로를 걸은 바람에 발바닥에서는 천불이 올라오고, 내 기억의 오류 때문에  오랜 시간 걷게 된 동생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동생에게 몇 번을 사과하자, 동생이 이렇게 아니면 언제 또 여기까지 와보겠냐고 위로해주었다.

 내려가는 길에는 한계치에 도달한 발상태와 샌들이라는 신발의 특수성으로 신발을 벗어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맨발 걷기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간혹 까슬까슬한 작은 돌이 섞여있어 따갑긴 했는데 다행히 대부분은 맨발로 걷기에 푹신한 흙길이었다. 핸드백 들고 맨발로 흙길을 걷는 건 불편했지만 왕복으로 30리가 넘는 문경새재길을 다 걷고 나서 이제 나는 영영 문경새재길을 못 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난 건데, 계획대로 착착 움직였던 그 어떤 여행보다도 성취감 가득한 여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핸드백 들고 샌들 신고 걷는 바람에,  오전 9시에 시작한 여정이 오후 1시가 훌쩍 넘어서야 끝났다. 오랜 시간 걸은 탓에 몹시 허기가 졌다. 맛집 검색 이런 거 없이 문경새재 앞 거리에 있는 음식점 중 더덕구이를 파는 집으로 들어가서 더덕구이 정식과 파전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음식으로 가득 찬 배를 퉁퉁 두들기는데 행복이 별거냐 싶었다.




 (운동부족 탓에) 발바닥 저 밑에서부터 그 어떤 통증과 열기가 하루 온종일 전해졌지만 죽은 줄만 알았던 내 안의 기력이 여전히  파닥거리고 있을 느낀 여행이었다.

기력을 회복한다고 잠자코 있는 것보다 남은 기력을 싹싹 긁어모아 격하게 써보는 것도 무기력을 쫓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들이라기보다 극기훈련에 더 가까웠지만, 무작정 여행도 꽤 괜찮고 매력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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