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한낮에는 덥지만 출근길 공기가 제법 선선하다. 사무실 책상 위 달력도 이제 9월이라고 말하고 있다.
8월의 월급날, 대학 후배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어쩌다 보니 삼척 쏠비치 무료 숙박권이 생겼는데 같이 갈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녀는 나와 여행 궁합이 잘 맞는 편인 데다 쏠비치는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정말 솔깃했다.
(나이와 학번이 뒤섞여) 대학 후배지만 나보다 언니인 그녀는 꼬박꼬박 나를 선배라고 부른다. (서로의 호칭과 상관없이) 항상 언니의 마음으로 나를 너그러이 대해주는 그녀를 나는 행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서로 바빠서 그동안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꽤 오래 만나지 못했는데, 이렇게라도 행님 얼굴을 보면 좋을 것 같아서 반나절 고민 끝에 함께 가기로 했다.
이렇게 어쩌다 보니 행님과 나는 9월의 아침을 삼척에서 맞게 되었다.
박효신의 오랜 팬인 행님을 위해 운전사인 나는 드라이빙 뮤직으로 박효신의 노래들을 준비하였다. 박효신 특유의 쓸쓸한 목소리가 우리의 가을 여행 분위기를 한 껏 살려줄 것이라 기대했다. 후훗.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만난 탓일까. 그동안 일발 장전했던 수다의 봇물이 터진 바람에 삼척까지 가는 길에 우리가 들은 박효신 노래는 3곡이 될까 말까 하였다. 우리 목소리에 묻혀 그의 노래는 배경음악으로도 들리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둘 다 잠시 입을 다물고, 박효신의 음악과 아름다운 강원도의 산천을 감상하자 했지만 그 침묵은 3분을 채 넘기지 못하였다.
숙소 하나 덜렁 믿고 떠나는 갑작스러운 여행답게 여행 일정을 가는 길에 짰다. 저녁을 위한 장을 볼 마트가 태백에 있어 점심은 태백의 맛집에서 먹기로 하였다. 메뉴는 여름 동안 금기시되어 그리웠던회로 결정되었다. 쫄깃하고 탱글한 회의 식감과, 회와 한상으로 차려지는 여러 반찬들이 무척 기대되었다.
행님이 검색한 맛집에서 우리는 만족스러운 구성의 2인 세트를 먹었다. 찬란한 안주들의 향연 앞에서 사이다를 마셔야 하는 그 점 하나 빼고 모든 게 완벽했던 늦은 점심이었다. 물론 여기서도 네버엔딩 수다가 두 시간 넘게 펼쳐져 부랴부랴 장을 봐야 했고,마침내진짜 목적지인 삼척 쏠비치로 향했다.
오래오래 이야기 꽃을 피운 덕에 늦게 도착한 쏠비치는 이미 야경을 준비하고 있었다. 과한 점심으로 산책이 필요했던 우리는 산토리니 광장부터 둘러보기로 하였다.
선선한 바람과 잔잔한 음악 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가을밤 산책이었다. 산토리니 광장에서 내가 유독 오랜 시간 맴돌며 집착했던 조형물은 특히 밤 속에서더신비로워 보였다.
이곳에서 행님과 나는 (두 마디 말만 할 줄 아는 사람들처럼)우와 좋다, 진짜 좋네이 말들만 연신 내뱉다가삼척의 밤바다로 걸음을 옮겼다.
여름이 지나간 밤바다는 무척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모래사장 위를 거닐다가 잠시 걸터앉아 파도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유명 맥주 브랜드에서 운영하는 부스에서계속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그 선곡 탓에)순간,우리가 있는 곳이 삼척이 아닌 동남아 휴양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상의 공간에서 불과 3시간 떠나왔을 뿐인데, 날 서있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둥글둥글한 나만 바다 앞에 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행님이나 나나)적어도 여기서만큼은 일상에 대한 개탄이 없는 그저 천진난만한 낼모레 불혹들이었다.
1박 2일 여행에서 안 먹으면 섭섭할 삼겹살과 맥주로저녁을 마무리하고 우리 둘 다 일찍 잠에 들었다.
행님은 업무 스트레스로, 나는 무더위 탓에 여름 내내수면부족 상태였는데 우리 둘 다 오래간만에 딥슬립을 하였다.
일찍 일어나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다시 산토리니 광장을 찾았다. 아침의 산토리니 광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어젯밤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 입에서 나온 말은 어제와 똑같은 우와 좋네, 진짜 좋다 이 두 마디 말뿐이었다.
삼척에서 9월의 아침을 시작하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유쾌하고 행복한 이 기분이 조금은 길게 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