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 한 번에 낼 수 있는 연차로 유럽권을 가는 것도 감지덕지인데, 그 빡빡한 일정 안에 근교 여행을 욱여넣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 근교 여행이 주는 만족감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 어떻게 해서든 근교 여행을 꼭 하고 오는 편이다. 아일랜드와 관련된 책을 3권 정도 읽어가며 더블린 근교 여행을 계획할 때,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사실 따로 있었다. 같이 가는 동생이 가고 싶은 곳에 모허 절벽이 있어 이번 근교 여행은 이곳으로 정했다.
모허 절벽은 더블린에서 차로 2~3시간 떨어진 곳으로 위치상 내가 사는 인천에서 강원도에 놀러 가는 것과 비슷했다.
이 정도 거리면 여행사 데이투어를 신청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미리 예약을 하고 갔다. 내가 못 찾은 것인지는 몰라도 한국어 가이드로 진행되는 투어는 없었다. 이전에도 현지 가이드로 진행되는 것을 몇 번 해본 적이 있어 두려움은 없었지만 언어의 한계로 가이드의 알토란 같은 설명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동거리가 있어서인지 출발장소 집결시간은 오전 6시 45분. 구글맵으로 찾아본 결과, 만남의 장소는 숙소에서 도보로 15분인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초행길인 것을 감안해 일찍 출발했다. 새벽 6시의 더블린은 밤같이 어둡고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그래도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한국에서든 외국에서든 새벽부터 열심히 움직이는 분들을 보면 건강한 자극을 받는다. 오늘 나는 비록 소풍을 가지만, 돌아가면 내 일상의 부지런함을 다시 한번 점검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새벽의 길거리에는 노숙자도 많았다. 몇몇 분들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옆을 지나갈 때마다 무서움을 느꼈지만 행인인 우리에게 딱히 관심은 없어 보였다. 사실 더블린 길을 걷다 보면 구걸하는 노숙자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대다수가 젊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국가경제가 안 좋을 수도 있고 개개인의 사연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젊은이들이 길거리에 나앉아있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턱 막히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사지 멀쩡한 젊은이가 왜 저러고 있을까 하면서 한 개인의 불성실함으로만 봤을 텐데, 지금은 그 개인보다 그 국가의 정치 경제 상황, 사회 제도 등에 물음표를 던진다.
더블린의 새벽풍경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단 한 번의 헤맴 없이 일찍 도착한 바람에 우리가 탈 버스를 이십 분가량 기다렸다. 명단 체크를 하고 버스에 올라탔는데 꽤 많은 사람이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더블린 시내 어둠을 가로지르며 가이드의 멘트가 시작되었다. 잘 들리는 발음을 구사하는 가이드 덕에 예상보다 많은 정보를 얻었지만, 내가 지금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심은 계속 들었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한 번 쉬었는데, (필수시설이 다 있고 깔끔했는데도) 구색 잘 갖춰진 우리네 고속도로 휴게소가 생각났다. 같은 버스를 탄 다른 나라 여행객들에게 우리나라 휴게소 클라스를 보여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뭐 그런 잡다한 상상을 하다가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번에는 가이드가 아일랜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 설명 끝에 U2의 Sunday Bloody Sunday와 Cranberries의 Zombie를 틀어줬다. 특히 Zombie의 경우 10대 시절 Now라는 카세트테이프로 아무 생각 없이 즐겨 들은 노래였는데,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나서 가사에 집중하니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들을 노래가 아니었다. 이번에 여행 준비를 하면서 그동안 무심코 즐겨들은 노래들 중 상당수가 아일랜드 출신 가수들이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우리 가이드의 앤솔로지 리스트에 Damien rice와 Westlife는 없었다.
리드미컬하고 유머러스한 가이드의 멘트 덕인지, 그가 틀어준 노래들 덕인지 단 한순 간도 지루한 줄 모르다가 대망의 모허 절벽에 도착했다.
방문 전 모허 절벽의 사진들을 보고 제발 날씨가 좋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는데, 다행스럽게도 날씨가 진짜 좋았다. 가이드가 불과 어제 팀만 해도 비바람이 불어 이 광경을 못 봤는데, 우리는 정말 운이 좋은 팀이라고 했다.
드넓은 벌판을 지나고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자 아무 말도 못 하게 만드는 모허 절벽의 절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엄밀히 절벽과 바다 말고는 특별할 게 없는 곳인데 개인적으로 내가 참 좋아하는 자연 풍경이었다.
나는 우거진 산과 산이 만들어낸 절벽보다는 탁 트인 벌판, 바다와 어우러진 절벽의 아름다움에 더 매료되는 편이다. 모허 절벽은 딱 그런 풍경 속에 있었다. 절벽이란 지형을 보면 늘두렵고 무서운 느낌이 들곤 했는데, 모허 절벽 앞에서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런 느낌이 처음이라) 절벽을 더 가까이보면서 사진을 찍으려고 길을 따라 좀 더 안으로 들어갔는데 희한하게 가까이 갈수록 (절벽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어) 감흥이 떨어졌다.
삼재라는 것이 진짜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삼재의 시간 동안 진짜 참 뭘 해도 안된다는 느낌, 소위 말하는 절벽 끝에 놓인 기분으로 눌려 지낸 적이 있었다. 너무 일차원적인 연상이지만, 절벽 앞에 서니 그때 있었던 많은 일들이 주욱 스쳐갔다. 멀리서 봐야 느껴지는 모허 절벽의 아름다움처럼, 절벽 같았던 그 시기도 지금보다 훨씬 많이 멀어지면 그 시간들의 의미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을 확인한다는 핑계를 대고서라도 먼 훗날 다시 한번 모허 절벽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허 절벽에서의 투어를 마치자, 가이드가 자기의 favorite place라며 baby cliff라고 불리는 곳으로 데려가 줬다. 훼이보릿을 엄청강조하길래 기대했는데 개인적으로 별 느낌은 없었다. 다만 아일랜드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기 위해 돌을 밟으며 바다 쪽으로 걸어가다 (돌과 돌 틈새로 피어있는) 민들레꽃을 발견했는데 이 꽃이 그렇게 장하고 기특하게 여겨져 이 근처에서만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댔다.
데이투어를 마치고 더블린으로 돌아오는 길,
가이드가 직접 기타를 치며 아이리쉬 노래를 불러주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나만의 명장면이 생기곤 한다. 버스 창 너머로는 점점 해가 지고, 가이드의 담백한 기타 연주와 친근한 노랫소리가 퍼졌던시간 속의 내 모습은 아일랜드 여행에서 영영 간직할 한 장면중 하나가 되었다.
더블린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는데 가이드가 한 명 한 명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주었다.
그가 나에게 아일랜드에서의 어떤 장면을 만들어준 것이 고마워 작은 보답으로 Korea가 적힌 책갈피와 (내가 먹으려고 싸갔던) 소주를 선물로 주었다. 아일랜드 다니엘은 한국 소주 맛을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해진다.
밤 같은 새벽부터 새벽 같은 밤까지, 이번 근교 여행도 완벽했다. 어딜지도 모를 다음 근교 여행은 내게 또 어떤 장면으로 남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