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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Nov 13. 2019

두려움 없이, 제임슨 위스키


아일랜드에 가고 싶었던 건 순전히 영화 러브, 로지 때문이었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은 몹시도 사랑스러웠고, 돌고 돌아 결국 서로에게 향하는 뻔한 러브스토리와 해피엔딩도 좋았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그 무엇보다 좋았던 건 바로 영화에 등장하는 풍경이었다. 영화에 대해 이리저리 검색하다 그 풍경들이 아일랜드에서 촬영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때부터 나는 아일랜드에 대한 환상과 꿈을 갖게 되었다.


 


아일랜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영화 속 풍경에만 향했던 탓이었을까. 영화를 본 지 5년씩이나 되었음에도 아일랜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이번 더블린 여행을 준비하고 나서야 아이리쉬 위스키가 유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일랜드에 가면 그 위스키가 첨가된 아이리쉬 커피 한 잔쯤 마시고 와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 나는 올봄에 소공녀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주인공 미소가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였던 위스키.  (허구의 인물일지언정) 누군가에게 최종의 최종까지 놓을 수 없는 세 가지 중 하나가 위스키라는 사실에 위스키에 대한 호기심이 확 생겼다. 또 지금껏 위스키를 단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었기에 그 신비감은 배가 되었다.



위스키 무경험자인 내가  위스키 시음을

제임슨 디스틸러리에 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더블린의 오후 풍경과 리피강을 감상하며 주욱 걷다 보니 양조장이 나왔다.  양조장 투어를 예약할 때 실수를 저지른지도 모르고 도착하자마자 건물 내부를 휘저으며 사진 찍기 바빴다. 투어시간이 다가와 예약한 것을 다시 체크하는데 뭔가 잘못됐다는 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신청한 것은 위스키 초보자가 아닌 평소 위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국적이 제 각각인 10명의 참가자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프로그램 진행자가 자기소개를 시켜서 한 마디씩 하는데 다들 위스키를 자주 마시는 위스키 애호가라는 게 느껴졌다. 내 차례가 되어 사실 나는 맥주를 엄청 좋아하고, 오늘 위스키를 처음 마시는 거라 긴장된다고 했더니 다들 귀엽다는 듯 웃어주었다.




 4가지의 위스키가 우리 앞에 놓였다. 물과 스포이드도 함께 있었는데 위스키에 물 몇 방울을 떨어뜨리면 그 향과 풍미가 더 좋아진다는 것 같았다.

위스키도 잘 몰라 죽겠는데 영어는 또 왜 그리 안 들리는지 이쪽저쪽 눈치를 살피며 주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해 가면서 찬찬히 마셔보았다. 생애 첫 위스키가 내 목구멍을 관통하자,  정말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세련되게 행동하고 싶었지만 나도 모르게 오만상을 리고 비명을 삼켰다. 목구멍부터 위까지 위스키의 이동을 온몸으로 느낀 순간이 지나자 몸의 온도가 확 오르는 것 같았다. 소주, 맥주, 와인, 막걸리를 마실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라 바로 또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 새 취한 건지 적응이 된 건지 이번에는 캐러멜 맛이 났다. 타들어가는 씁쓸함 끝에 달콤함의 여운이 맴도는데 그게 싫지 않았다.



 위스키를 마실 때마다 가이드가 잔을 들어 잔에 담긴 위스키를 빛에 비추어 보게 했다. (영어 실력의 부족으로) 무슨 의미로 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하라니깐 하긴 했다. 각각의 위스키를 마시기 전에 항상 향도 맡아보게 했는데 술을 입으로만 마시는 게 아니라 눈과 코로도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두운 방, 바에 걸터앉아 위스키를 들이켜는데 괜히 내가 썩 괜찮은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꼭 위스키가 아니더라도 마흔 이후부터 내가 꾸준히 고집부릴 취향 한 두 개쯤 정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떤 취향이든) 확실한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만이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가 참 좋다. 그냥 근사하다.



 내겐 너무 수준 높았던 위스키의 첫 시음을 끝내고, 교육장에서 나와 내 입맛에 맞는 상큼한 칵테일을 주문해서 마셨다. 메뉴에 쓰여있지 않았다면 위스키가 들어간 건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맛.

시음부터 마지막 마신 칵테일까지 생각보다 위스키를 많이 마신 셈이었는데 희한하게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양으로 기분 좋게 취하는 게 늘 어려웠는데, 위스키는 첫 판에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모든 게 다 괜찮은 것만 같고, 마음속에 있는지도 몰랐던 용기라는 것이 샘솟는 시간이었다.




양조장을 들어갈 때 보이는 제임슨 가문의 가훈

sine metu, 두려움 없이.
그의 위스키를 마시고 나는 정말 잠깐 두려움을 잊었다.

두려움이 끝도 없이 밀려와 휘청거릴 때를 대비해 양조장에서 나오며 위스키를 샀다.

sine metu.
지금 나에게 몹시 필요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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