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 간 도시가 아닌 이상, 직장인으로서의 내 여행은 여행사에서 제시하는 일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번에는 좀 색다르게 여행해야지 하다가도 시간의 빠듯함, 여행에 들인 비용들을 생각하면 그 도시의 랜드마크와 유명 관광지를 안 찍고 올 수가 없게 된다. 이렇게 뻔하고 뻔한 여행 일정 안에서 그나마 내가 변주를 하는 게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좀 오래 머무는 것이다. 이것도 여행을 같이 가는 사람이 있을 땐 하기 어려운데 이번 런던 여행 때는 운 좋게 온전히 혼자만의 하루가 주어졌다.
그림 그리는 것에 단 하나의 소질이 없는 나는 학창 시절 미술시간이 정말 싫었었다. 그때는 나보고 그리라고 하고 내 그림의 점수를 매겨서 싫었던 것이지 그림 보는 것은 이때도 좋아했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기회가 될 때마다 스스로 미술관에 그림을 보러 갔다.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에 기대든 그렇지 않든 미술관에서 한참 그림을 보고 있으면 뭘 알고 보는 게 아니어도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날 때 그곳의 미술관은 되도록 가려고 한다.
특히 이번 미술관 여행은 준비할 때부터 운이 좋았다.
여행 가기 한 주 전에 우연히 동네 도서관에서 (유럽의 미술관을 중심으로 하는) 미술 강연을 들었는데, 그 강연이 정말 좋았던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용기 내서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사실 다음 주에 내가 런던과 더블린에 가는데 거기서 보고 오면 좋을 그림을 알려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드렸다. 선생님께서 당신 책을 말하게 돼서 민망하지만 런던 내셔널 갤러리와 관련된 책을 이미 쓰셨다고 하셨다. 그 대답을 듣자마자 신이 나서 책을 주문하려고 검색했는데 서울에만 재고가 있었다. 책을 사려고 서울까지 가서 결국 선생님의 책(김영숙 저, 내셔널 갤러리에서 꼭 봐야 할 그림 100)을 손에 쥐었다.
런던 도착 전까지 완독 하는 게 목표였으나 결국 책을 읽다만 채로 미술관에 당도했다. 내 손에는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과 지도가 담긴 책이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책에는 각 그림이 어느 전시실에 있는지 적혀 있었는데, 그림들의 전시 배치가 바뀌어서 살짝 헤매긴 했다. 그래도 전시실을 돌아다니면서 책에 나온 그림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정 모르겠으면 전시실마다 있는 미술관 직원 아무나 붙잡고 그림을 보여줬는데 누구든 그 그림의 위치를 자세하고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내셔널 갤러리에서만 거의 5시간 넘게 있었기 때문에 책에 소개된 100점의 그림은 거의 다 볼 수 있었다.(소개된 그림 중 몇 점은 다른 미술관에 전시 중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들 중 내가 유독 오랜 시간 감상했던 그림이 몇 점 있었다.
1. 한스 홀바인, <대사들>
일단 이 그림은 규모로 압도하는 면이 있었다. 나는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그림이었는데 유명한 그림인 건지 이 그림 앞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다른 그림을 먼저 보고 사람이 좀 없어졌다 싶을 때 다시 가서 천천히 감상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영국에 업무차 와 있던 프랑스 외교관과 고위 성직자라고 한다. 아마 책을 안 읽었더라면 조금 큰 초상화인가 보다 하고 지나쳤을 그림이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 보니 화가가 그림으로 표현한 것 하나하나의 의미를 찾는 재미가 무척 큰 그림이었다.
그림의 양탄자 깔린 상단에는 나침반, 천구의, 해시계 등 당대의 과학 기구들이 있고 하단에는 지구본, 류트라는 악기, 찬송가가 있다. 책에 따르면 이 사물들은 두 대사가 가진 여러 지식이 하늘로부터 땅에 이르는 모든 것에 대한 것임을 은유한다고 한다. 그냥 여기까지였다면 또 그런가 보다 했을 텐데 화가는 그림 좌측 상단에 보일 듯 말듯한 십자가상을 하나 그려 넣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섭렵한다 해도 결국 신의 의지 하에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특히 이 그림을 오른쪽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림 밑부분 정체불명의 것이 해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바니타스, 즉 모든 것이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허무'를 의미한다고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지식이란 그것이 제 아무리 대단해도 신의 뜻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화가가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이런 심오한 뜻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그림을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볼 줄 몰랐다면 그냥 지나쳤을 그림이라 내겐 더 의미 있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을 감상할 때 내 옆에는 십 대로 보이는 학생 여러 명과 선생님으로 보이는 한 분이 있었다. 선생님이 어찌나 설명을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하시는지 나도 같이 빠져서 열심히 들었다. 역시 그림에 대한 기본 지식을 탑재하고 들으니 영국 영어가 그렇게 잘 들릴 수 없었다.
2. 에두아르 마네, <카페 콩세르에서>
처음 보는 마네의 그림이었다. 내가 이 그림에 오래 서 있었던 건 책에 나온 마네의 실패담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네가 화가로 활동하던 시대의 프랑스 살롱전은 화가들이 제도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였다고 한다. 낙선하면 작품을 팔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에 더러는 자살을 감행하는 일까지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나폴레옹 3세는 살롱전에 출품된 작품만을 모아 '낙선전'을 개최했는데 낙선전에 전시됐던 그림 중 하나가 바로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였다는 것이다. 천하의 마네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니 왠지 모를 인간미와 친근감이 느껴졌다.
이 '카페 콩세르에서'라는 그림은 그림의 화면 때문에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이유로 야유를 받았다고 한다. 당대 전문가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 그림이 좋았다. 카페 여종업원의 무표정한 얼굴도 좋았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남자 손님의 등짝도 좋았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처럼 뭔가 깊은 뜻이 있는 그림도 좋지만, 에두아르 마네의 카페 콩세르에서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그려진 그것만으로 좋은 그림도 있다.
3. 티치아노 베첼리오, <시간의 알레고리>
이 그림은 설명 없이 봤더라도 한참 서서 봤을 그림이라고 확신한다. 그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림의 제목 또한 멋있다. 이 그림은 청년에서 장년 그리고 노년으로 변해가는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그림이라고 한다. 왼쪽의 노년이 화가인 티치아노 자신이고, 장년이 아들 오라치오, 청년이 조카 마르코다. 인생의 세 시기는 각각 개, 사자, 늑대의 성질로 은유된다고 한다. 젊어서는 개처럼 순종적이다가 나이가 들면서 사자처럼 용맹해지고, 늙어서는 늑대처럼 사려 깊어진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특히 책에서 인물들 위의 검은 배경을 자세히 보면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해서 살펴봤더니 진짜 어떤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영어 같진 않았는데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를 신중하게 살아 미래를 망치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가끔 이렇게 인생의 어느 시점에 꼭 필요한 말로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그림이 있다. 내가 미술관에 갈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그림을 보느라 평소보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그만큼 더 단단하게 기억되는 미술관 여행이었다. 런던 여행 일정 중 가장 꽉 찬 하루이기도 했다. (너무 오래전 이긴 하지만) 대학시절 배낭여행했을 때도 분명히 갔던 내셔널 갤러리인데 그땐 도대체 뭘 보고 돌아다닌 건지, 아예 처음 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선생님의 재밌는 미술 강연은 이어졌다. 선생님의 책 덕분에 미술관 여행이 풍요로워졌다고 감사인사를 드렸다. 여행 가기 전 우연히 멋진 분을 알게 돼서 그만큼 멋진 그림들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