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보는 사주에서나, 학교에서 받았던 MBTI를 통해 나의 적합한 진로로 매번 거론된 것은 '교육'이었다. 누굴 가르친 경험이라고 해봐야 대학생 때의 과외 아르바이트, 봉사활동이 전부고 배운 경험으로 따지면 그보다 훨씬 많다. (어차피 누굴 잘 가르칠 능력도 없었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특히 나는 배우는 과정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였을까. 몸은 아직 회사에 있는데 '퇴사'라는 키워드가 내 영혼을 잠식할 때 제일 먼저 한 일도 강연을 찾고 그것을 듣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몸과 분리된 영혼을 달래는 차원에서 내가 좋아하고 흥미로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다가 점점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번져갔다.
내 마음속 인기 검색어에 퇴사가 오랜 시간 등극하자, '퇴사'를 이미 경험하고 진로를 바꾼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진 것이다. 검색의 검색을 거듭하다가 한 언론사에서 만든 지식 콘텐츠 플랫폼을 알게 되었다. 아예 '퇴사'와 관련된 맞춤형 스터디가 하나 있었는데 내가 그걸 봤을 때 이미 접수가 마감된 후였다. 아쉬운 마음에 다음에 있을 스터디를 둘러보다가 신청한 것이 콘텐츠와 비즈니스에 관련된 수업이었다.
사람은 참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인지 나는 저 두 가지 중 '콘텐츠'라는 단어에 꽂혀 스터디를 신청했는데 듣고 나서 보니 콘텐츠는 거들뿐, 비즈니스에 상당히 힘이 실린 스터디였다.
(스터디를 하기 전) 나는 콘텐츠에 대한 나만의 정의가 있었다. 내게 있어 콘텐츠란, 콘텐츠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는 것들만이 콘텐츠였다.
재미가 있거나 울림이 있거나. 그냥 이것만으로 콘텐츠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상품이나 서비스를 팔아야 할 대상을 타기팅 하고, 파이의 크기를 키우고, 그래서 수치로 표현 가능한 각종 성장의 지표의 설명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로서의 콘텐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행 일정 때문에 첫 강연을 놓치고) 두 번째 강연을 들었을 때, 이 스터디를 계속 들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중간에 그만두기엔 스터디 비용으로 지불한 돈이 만만치 않아서 일단 참고 들어 보기로 했다.
10월 초부터 12월 초까지 격주로 4번의 강연을 듣는 동안, 이 스터디를 갔다 오는 날에는 유독 잠을 못 이뤘다.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새벽 1시는 기본이고, 새벽 4시까지 잠을 못 이룬 적도 있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왔다 갔다 했으면 그냥 쓰러져 잘 법도 한데 나는 왜 그토록 잠을 못 이뤘을까?
1. 10년 다닌 회사와 그 일에 대한 자각
자신의 처지를 파악하고자 할 때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을 만나는 게 이토록 도움될 줄 몰랐다. 스터디 참여자들 중 유독 나는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보통은 자신이 회사에서 하고 있는 현업과 본인이 운영하는 사업에 관련된 분들이 이 스터디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분들이 스터디를 대하는 태도와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나와는 확연히 달랐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 놓이자 나 스스로가 더 정확히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관심도 없었지만, 나의 경우 세상 물정에 예민하지 않아도 (심지어 몰라도) 월급이 따박따박 나온다. 쉽게 말해 나는 '필요'에 의해서 나를 적극적으로 움직여본 적이 없다. 법으로 정해져서, 위에서 지시해서 한 일은 있어도, 일을 하면서 내가 먼저 어필과 부탁을 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리고 기관 자체가 규모나 업무를 확장하는 일이 없으니, 개인 스스로도 성장이라는 이름하에 뭔가 보여줄 일이 없다. 법과 정부 정책의 흐름대로 그 지시사항을 그대로 수행하면 될 뿐이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사실 또 그러라고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서 주임과 대리로만 똑같은 일을 10년 한 덕분에, 나는 회사의 김대리가 아닌 채 바깥에 던져지면 잡아 먹히거나 굶어 죽기 딱 좋은 모양새가 되었다. 스터디에서 당연히 이런 내용을 다룬 적은 없다. 비즈니스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장하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절로 내가 처한 환경과 내 위치가 보인 것뿐이다.
눈과 귀가 철저히 닫혀있는 환경, 그리고 또 그것을 열려고 한 적 없었던 나를 발견하는 건 매번 나를 잠 못 들게 하였다.
2. 워라밸의 함정
내가 올해 가장 많이 힘들었던 부분은 회사원으로서의 10년을 돌아보니 내 손에 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워라밸의 함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입사하고 2년 차까지는 워라밸이라는 것이 없었다.
일을 배우고 던져진 일을 쳐내느라 몹시 바빴고, 조직생활에 적응하느라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들으라는 업무 관련 교육도 제법 많았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와 업무에 적응하고 나자 소위 나에게도 워라밸의 봄이 찾아왔다. 그동안 눌려있었던 것도 있었고, 이래서 다들 공공기관 가려나보다 하면서 내게 주어진 걸 진짜 십분 활용했다. 마침 인사고과 체계도 업무 퍼포먼스나 객관적 성과와 딱히 상관없이 보이길래 나만의 워라밸에 집중하기 쉬웠다.
당연히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확실한 법.
나는 적당히 일하고 적당한 월급을 받으며 적당히 내 시간을 누린 대가로 이렇다 할 업무적인 커리어가 단 한 개도 없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부족하고 모자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었다. 찾을 수 있었는데, 발전시킬 수 있었는데 내가 못한 것이라고. 그런데 기관 업무의 생리상 업무적인 커리어라는 것을 개발할 일은 애초에 없었고, (10년 동안 지켜본 결과) 기관 내 구성원의 위를 보건 옆을 보건 아래를 보건 그런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거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워라밸 하나만 있으면 돼' 내가 이런 상태였을 때는 나름 좋은 회사였던 것도 같다. 그건 내 욕구가 단 하나에 머무를 줄 알았을 때의 얘기고, 내 욕구랑은 비교도 안되게 휙휙 변하는 바깥세상을 몰랐을 때의 얘기였다. 그래서 그 달콤하기만 했던 워라밸은 이제는 빠져나와야 할 함정이 되고 말았다.
3. 비즈니스 마인드의 벤치마킹
나는 살면서 (지금은 접은) 경영지도사 자격증을 준비할 때 말고 경영 관련 수업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럴 기회도 없었지만,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분야기 때문에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러니 그 분야 이론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다. 4번 수업 들은 거 가지고 비즈니스 마인드가 함양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강연자들의 생생한 '비즈니스적' 접근으로부터 많은 힌트를 얻었다.
내가 꼭 비즈니스를 직접 운영하지 않더라도 비즈니스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더라도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배운 느낌이 들었다. 내가 회사를 다니며 가장 억울했던 부분은 바로 시간이었다. '10년'을 다녔는데 내가 손에 쥔 게 뭐지? 여기서부터 모든 질문과 괴로움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번 스터디를 듣다 보니 비즈니스는 A부터 Z까지 일단 '손에 쥐는'것에 모든 것이 맞춰있었다.
# '물고기'라는 것을 '손에 쥐기' 위해 일단 물고기들을 분석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내가 잡을 물고기를 타기팅 한다.
# 타기팅이 끝나면 그 물고기를 잡을 때 그물을 쓸지, 낚싯바늘을 쓸지, 그물을 쓴다면 어떤 기술을 써서 그물을 던질 건지 낚싯바늘을 쓴다면 어떤 미끼를 쓸 건지를 결정한다.
# 물고기가 잡히는 바다는 기후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으므로 기상상태와 주변 환경의 이슈를 항상 체크하고, 옆에서 물고기를 이미 잘 낚고 있는 주변 배들의 동태도 잘 살핀다. # 동네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가 한계가 있으면 더 먼바다로 나가기도 하고, 바다에서 잡는 걸로 한계가 있을 땐 양식도 하나의 옵션이다.
나는 무언가를 손에 쥐려고 할 때 그 무언가에 대해 이토록 분석하고, 손에 쥐기 위한 노력으로 이렇게까지 해봤을까 되돌아봤다.
단지 그냥 바다에 나가서 낚시를 해보는 것에 의의를 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손에 쥐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때그때 잡아야 할 물고기에 따라 이런 비즈니스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접근했어야 하는 것을 아닐까. 이렇게 해도 물고기를 잡을까 말까인 망망대해에서 나는 10년간 뭐가 뭔지도 모르는 바다로 출근해서, 주어진 그물과 미끼만 성실히 던져대다가 (내가 잡은 거든 남이 잡은 거든 중요치 않은) 정해진 물고기를 받아먹고살았다. 그러니 10년을 한다 한들 손에 쥔 게 없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다.
비즈니스에서는 결과와 성장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기 때문에 이런 마인드와 접근이 더 피부로 와 닿았다. 가깝게는 2020년, 멀 게는 그 이후에 내가 '잡아야 할' 물고기에 대해서 계획할 때 이런 비즈니스 마인드를 벤치마킹하려고 한다.
스터디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스터디는 뒤늦게 세상을 공부하는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사실 평일 저녁 스터디를 하기 위해 인천과 서울을 오고 가는 전철 안에서조차 느꼈다. 이런 종류의 강연은 철저하게 서울에서만 열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 내가 물고기를 잡고 살아야 할 바다의 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