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점심을 혼자 먹는다. 외근이 비교적 잦은 회사에서 이건 그렇게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나는 외근을 안 할 때도 점심을 (주로) 혼자 먹는다. 우리 회사의 경우 구내식당이 따로 없어서 모든 직원은 점심을 밖에서 사 먹는다. 지금 일하는 지점의 다른 직원들은 사무실 근처의 식당에서 식권을 사서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나만 혼자 따로 점심을 먹는다. 사실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도 처음에는 다른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올해 초부터 이상하게 점심을 먹을 때마다 소화가 잘 안되었다. 내 속도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속도를 맞추면서 밥을 먹는 탓도 있었고, 스트레스 때문인지 소화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좀 가볍게 샐러드나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으려고 혼자 먹기 시작했다. 혼자 먹고 나서부터 점심 이후에 속이 불편한 일이 사라졌고, 무엇보다 기분이 좋았다. 밥을 먹으면서 생각도 하고,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글도 쓰는... 근무 시간 중에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유일한 한 시간. 그 시간이 바로 점심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점심을 혼자 먹는 지금이 진짜 좋다.
얼마 전에 우연히 조직 생활과 관련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몇 년도에 써진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회사에서 혼자 밥 먹는 사람을 요주의 인물인양 써 놓아서 뜨끔하기도 하고 맘이 상해 끝까지 읽진 않았지만, 암튼 그 글에 따르면 나는 밥을 혼자 먹는 요주의 인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가능하면 회사를 나가기 전까지 점심을 혼자 먹을 생각인데, 밥을 혼자 먹으면서 좋은 점 중 하나가 바로 삶은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낼 필요도, 들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골츠(1869년, 독일의 생리학자)의 실험에서 유래했다는 '삶은 개구리 증후군'은 점점 고조되는 위험을 미리 인지하지 못하거나, 위험에 대한 적절한 조기대응을 못해 화를 당하게 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서서히 데우는 찬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곧 직면할 위험을 인지하지 못해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리 서서히 데워도 (개구리에 따라서) 그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개구리들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개구리들은 서서히 물을 데워도 그 위험을 알아채고 곧바로 뛰쳐나가기도 한다. 그리고 나같이 위험한 걸 감지하고도 즉각적으로 못 뛰쳐나가는 개구리도 있다. 삶아지면서도 위험을 못 알아채는 이유는 서서히 데워지는 물의 온도가 크겠지만, 함께 삶아지는 개구리들끼리 서로서로 주고받는 말도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올해 초, 나는 조금은 뒤늦고 뼈아픈 방식으로 내가 삶은 개구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도 그냥 삶아진 정도가 아니라 아주 푹푹 삶아진. 그리고 지금 당장 바로 뛰쳐나가지는 못하더라도, 되도록 (삶아 질대로) 삶아진 개구리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삶의 방식은 다양하고, 나 역시 현재 다리 하나를 걸치고 있지만 '삶아지는 것을 그저 편하게 생각한다거나 썩 괜찮다고 여기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한 냄비에서 대다수의 개구리들과 같은 울음을 낼 수 없는 것은 생각보다 힘이 든다. 나 혼자 돌연변이 개구리가 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비록 (나와 다른) 개구리의 울음을 들으면 흔들흔들하는 나약함이 있지만 다행히(?)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는 용기는 있다. 점심시간외엔 내 일만 집중해서 하면 되니까 근무시간의 한가운데인 점심시간의 고비만 넘기면 된다.
삶아지는 내내 말랑말랑해졌던 근육이 탄탄해지고, 쫙 펴졌던 뇌가 쭈글쭈글해질 때까지만 조직 내 요주의 인물로 혼자 밥을 먹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