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의 힘든 점은 직장에 따라,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한 마디로 이것이다 라고 말하기 어렵다.
내게도 직장생활에 대한 나만의 힘든 점 몇 가지가 있는데 며칠 전 본점에서 날아온 공지를 보고 그 몇 가지 중 하나가 갑자기 머리를 스치었다.
나는 신입시절 유독 상사와 선배들의 말을 잘 못 알아 들었다. 전공지식을 발휘하는 일을 한다거나, 자격증이 요구되는 일이었다면 모를까. 모든 업계는 그 업계만의 용어가 있어서 그 용어에 익숙해지는 것부터가 직장생활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갓 들어온 내가 업무 관련 용어를 잘 못 알아듣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이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건 그냥 시간이 지나면 차차 해결될 일이었다. 입사하고 몇 개월이 지나자 나는 마치 회사에서 쓰는 말들이 원래 내 일상용어 인양 자연스럽게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업무 용어와 상관없는 말도 잘 못 알아듣는다는 데 있었다. 업무 지시를 받거나 업무 설명을 들을 때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다반사였다. 언제나 그걸 나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이해한 뒤 이게 맞는 것인지 되물어보는 일들이 많았다.
업무 지시를 하거나 업무 설명한 사람의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내가 못 알아듣는 것은 분명했다. 이런 일들이 자주 발생하자 조직 생활에 있어서 자신감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것 때문에 이미 회사 다닌 지 꽤 된 친구들한테 전화를 해서 고민을 토로하기도 하고, 심할 때는 운 적도 있었다.
자괴감에 시달려 괴롭다가도, 내가 말을 하는 화자들보다 지적 수준이나 교육 수준이 딱히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고민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그리고 10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거의 고민하지 않는다. 일단 업무 관련된 지시나 설명을 듣는 일 자체가 거의 없기도 하고 내가 왜 유독 말을 못 알아 들었는지 그 이유를 나 나름대로 찾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며칠 전 받은 공지는 내년 정기인사에 대한 ‘예고’였다.
그 예고의 주요 골자는 내년 초에 있을 정기인사의 구체적인 내용과 추후 일정에 대한 것을 미리 직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내가 지금도 적응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인사인데 우리 회사는 늘 인사를 번갯불에 콩 볶는 식으로 진행한다. 그러니 공지도 야반도주 식으로 갑자기 날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니 저런 예고가 도입된 건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인사이동을 대비해서 진행 중인 업무를 점검해서 미리미리 마무리 짓고, 인수인계할 것도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기인사에 대한 ‘예고’의 의의란 여기까지다.
업무 단절과 손실을 최소화하고 더 나아가서 회사 일정과 직원 각자의 개인 일정의 조화를 꾀할 수 있는 것.
그런데 문서의 서두에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2020년 정기 인사예고는 인사요인과 일정을 예고하여 인사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높이고... 그 문구를 읽는 순간 두 눈을 깜빡거리며 한참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공정성과 객관성이란 말의 뜻이 내가 모르는 새 바뀌었던가. 그리고 그 인사의 공정성과 객관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예고’ 했다는 것으로 도모되는 것이었던가.
본질을 흐리는 갖다 붙이기 식의 포장술과, 현실과 상당히 괴리된 어휘의 오용은 매번 나로 하여금 조직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으로 만든다.
같은 지점 과장님이 “김대리, 정기인사예고 관련해서 뭐 문서 왔어?” 물어보시길래 문서에 담긴 내용을 간략히 추려서 말씀드렸다. 물어보셔서 대답해드렸더니 상당히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시며 "근데 그거 왜 하는 거야?" 그러셨다. 그러게요. 사실 인사‘예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인사가 얼마나 ‘객관’적이고 ‘공정’하냐가 중요한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