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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리의 2019년을 돌아보며

by 앤디



출근 지하철을 타고 서울에 온 것이 거의 1년 만인 것 같다. 작년에 서초에서 있었던 교육을 들으러 간 이후 올해 처음으로 평일 아침에 서울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국철이 더 빨랐지만, 마침 도착지가 서울역이라 바깥 풍경이 보이는 공항철도를 일부러 탔다. 강을 바라보고 있을 때쯤 목소리가 상당히 좋은 공항철도 직원분의 인사 방송이 나왔다. 주변 소음으로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2019년을 되돌아보며 후회와 아쉬움보다는 감사와 고마운 마음을 가지셨으면 좋겠다며 올 한 해도 공항철도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목소리만큼이나 듣기 좋은 말이었다.

안 그래도 12월이라 거의 매일 올 한 해를 돌아보고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올해는 내게 의미 있는 한 해였다. '회사를 나가고 싶다'라는 한 문장으로 시작한 일련의 과정에서 그 어느 때보다 '나'라는 사람을 고민하고 '나'라는 사람을 깨닫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좀 더 빨리 이런 시간을 가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나의 가장 빠른 시기는 지금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어쨌든 회사 관련으로 서울에 가는 길이었고, 내년이면 이 회사에서 꽉 채운 10년이니 공항철도 직원분의 말처럼 내가 회사에 대해 고마운 것들은 뭐가 있는지를 천천히 되돌아보았다.






1. 월급



내가 내 시간과 노동력 들여 받은 대가였지만, 그래도 날짜 한 번 어김없이 들어오는 월급은 정말 고마웠다. 그 덕에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물질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싶을 때 주저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게는 이 점이 월급의 가장 큰 의미였다. 집은 아직 없지만, 얼마간의 저축이 있고, 차를 샀다. 그리고 삼십 대 내내 저지른(?) 모든 경험들 역시 월급이 있어 가능했다. 나의 취향 혹은 허영을 반영한 기타 등등도 월급이 아니면 못 샀을 것이다. 지금 당장 정글 같은 바깥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자금이 돼주는 것도 월급이고, 직장인이 아닐 때를 시뮬레이션하며 나이브한 마음을 다 잡는 기준이 되는 것도 월급이다.



2. 회사가 아니었으면 영영 몰랐을 캐릭터들과의 만남



사내 동아리 회식 때 후배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참 작은 회사인데, 온갖 캐릭터가 이 회사 안에 다 있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직원들 모두 웃으며 공감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선후배들이란 대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회사라는 장소로 엮이지 않았다면, 사는 동안 알고 지낼 리 없는 사람들을 회사를 다니며 알게 되었다. 책이나 영화, 드라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캐릭터들이었다.


나 역시 어떤 이들에게 그런 캐릭터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회사를 다니며 들었던 말들은 생각 좀 많이 하지 말라라든가, 개성이 강하다, 피가 뜨겁다, 자유로운 영혼 등등이었다.

솔직히 나는 어떤 틀 안에 갇힌 모범생으로 자랐기 때문에 어디 가서도 적응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신하는 게 있었다. 게다가 회사가 나름 공공기관이니까 무난하고 상식적인 분위기일 거라 생각하고 이 곳 역시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조직이 생각하는 인재상은 내가 기대하는 것과는 상당히 괴리가 컸고, 그런 인재(?)들이 모여 자아내는 조직 문화라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덕분에 사람 공부가 많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잘 몰랐던 인간 유형의 노골적인 욕망을 보았고, 그 욕망을 위해 인간이 어떤 선택을 감행하는지도 보았다.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들을 통해, 내게도 있을 그것을 경계하는 반면교사로 삼기도 했다.
당연히 좋은 분들도 몇 분 계시지만, 그분들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안타깝게도) 조직 내에서 그분들의 목소리는 너무 쉽게 묻히었다.


3. 내가 발 딛고 사는 세상에 대한 깨우침



무언가를 공부할 때 주입식과 암기식으로 점철된 방식을 가졌던 내가 이건 왜 이렇고 저건 왜 이러지?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도 회사 덕분이었다. 학생 때야 모르면 여쭤볼 선생님이 계시지만, 직장인으로서 생기는 궁금증과 의문은 몸으로 부딪히며 스스로 깨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겪은 것만큼 절절하게 와 닿는 것은 없었다.



대학 때, 교양수업으로 여성학 수업을 몇 학점 들은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여성들이 겪은 일이란 다 과거 역사 속의 일들이고, 내가 사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설마 아니겠지라는 순진무구한 생각을 했더랬다. 사회에 진출해보니 세상은 그 과거로부터 더디게 변하는 중이었고, 이상이 반영된 세상은 아직 아니었다. (부족한 능력으로 막대한 양을 공부하기 어려워 포기했는데) 끝까지 공부해서 전문직으로 일했어야 했나 후회가 들었던 것도 회사생활을 해보고 든 생각이었다.

회사는 다양한 세대가 어우러져있다. 회사를 다니지 않았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 가까이에서 나와 다른 세대를 지켜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직장생활을 10년쯤 하다 보니 나를 기준으로 윗 세대도 제법 있고 아랫 세대도 제법 있다. 내가 회사에서 본 몇 안 되는 사람들이 그 세대 전체를 대변한다고는 생각지는 않지만, 유독 어떤 세대의 사고와 행동방식이 이해되지 않을 때 세대별로 접근해서 생각한 적이 많았다.

흔히 요즘의 젊은 세대를 가리켜 어떤 세대보다 풍요롭게 자랐지만 부모 세대보다 못살게 된 첫 번째 세대라는 말을 많이 한다. 나 하나만 돌이켜봐도 맞다는 생각이 든다. 양가에서 1원 한 푼 받은 것 없이 정말 열심히 사신 부모님 덕분에 특별한 불편 없이 자랄 수 있었다. 특히 딸이라는 이유로 교육에서 엄마를 철저히 배제시킨 외할아버지를 둔 덕분에, 나는 그 누구보다 엄마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성장과 경기침체라는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진 오늘 이 세상은 부모님처럼 단지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부모님이 이룩하신 것을 얻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우리 회사로만 좁혀서) 회사 윗세대를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자주 했었다.


저분들이 사는 저 세대의 세상은 뭐가 저리도 관대하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게 입사가 쉬었는데, 승진도 참 빨리 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올라갈 자리가 없으면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올라가는 것도 보았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다 보니 그들의 업무 노하우나 실력을 보면 세월이 무색할 지경이다. 소박한 업무능력으로 어떤 자리를 쉽게 꿰차고 누린 시간이 길었으니 당연히 아랫 직원에게 요구하는 것에도 명확한 기준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들이 일 잘한다고 평가하는 직원을 보면 본인들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가 됐든) 군말 없이 처리하거나, 술 한잔이라도 더 마셔주는 직원들이다.

그런 와중에 또 예전에는 없었던 단계가 자꾸 생긴다. 예전에는 자동 승급이었던 것이 이제는 승급 시험을 봐야 하고, (본인들은 있지도 않은) 자격증 소지자를 우대하여 자격증을 따게 만드는 분위기를 만들고, 별로 없는 자리를 두고 싸워야 하는 승진인사를 무기로 본인들 구미에 맞게 행동하게끔 직원들을 조종한다.

가물의 콩 나기 적인 기회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그 별로 없는 기회를 얻으려고 박 터지게 노력하느라 점점 더 똑똑해져 있다. 그렇게 어렵게 기회를 잡아 세상에 진입하면 저런 사람들이 내게 업무지시를 하고, 저런 사람들이 나를 평가한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세상에서 산 세대가 그 어느 때보다 관대한 세상에서 산 세대로부터 느끼는 박탈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가는 혹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에서 잘 살아남으려면 세상을 일단 알아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회사 생활은 세상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분명 큰 도움이 되었다. 그만큼의 상처와 스트레스도 동시에 주었지만 월급을 받으면서 뭔가를 배웠으니 어쨌거나 감사하게 생각할 일이다.

회사의 부적응자로서든 뭐든 같은 회사에서 10년을 버텼다. 어떻게 보면 참 미련스럽고 어리석은 일이다.
다만 싫은 것에 대한 참을성이 몹시 부족한 내가 한 곳의 직장인으로서 10년을 버틴 경험은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일을 버터야 할 때 튼튼한 기초체력이 돼 줄 것이라 믿는다.


2019년이 가면, 정확히 10년째 직장인이 된다. 그리고 올해의 고민을 바탕으로 직장인이 아닌 삶을 위한 첫발을 내딛는 2020년이 온다. 2019년은 변화를 위한 결심을 단단히 할 수 있었던 한 해였다.


되돌아보니 고맙고 감사한 일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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