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는 회사 노조원들의 회식이 있었다. 꽤 많이 모인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얼마 전 퇴사 소식을 전해온 신입사원도 눈에 보였다. 나는 그 신입사원과는 직접적으로 대화 한 번 나눠본 적이 없다. 다만 이제 다른 미래가 펼쳐질 것이니 회사 행사에 안 올 줄 알았는데, 어느 대학의 로스쿨 예비합격 1번이라는 그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 남자 직원은 남자 직원끼리 여자 직원은 여자 직원끼리 신입사원은 신입사원끼리 나눠 앉아 밥을 먹었다. 다른 테이블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리지 않았고 내가 앉은 테이블에서는 각자가 일하는 부서에서 일하는 고충, 상사에 대한 불만 등등 결국 또 회사 얘기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내 옆에 앉은 후배가 입을 열었다. 회식 당일 '인사총무부' 책임자가 후배가 일하는 지점의 지점장님을 다급히 찾는 전화가 왔었다고 한다. 전화를 받은 후배가 지점장님이 고객과 상담 중이라고 했는데 급하니까 빨리 바꿔달라고 해서 결국 전화를 돌려줬다고 한다. 급하다고 했던 통화내용은 우리 기관장님 부인이 참가한 시니어 모델대회 투표마감일이 오늘까지니 서둘러 투표하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 전화를 받은 지점장님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셨다고 한다. 그 투표를 종용당했던 다른 선배의 (먹고살기 힘들다는) 볼멘소리를 이미 들었던 터라 그런 일이 있었던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들으니 또 새로웠다. 나중에 그 선배는 내게 해당 투표 사이트에 가면 누가 가장 적극적으로 그 투표에 참여했는지가 보이는데 그 사람이 바로 우리 회사 '전략기획부' 책임자란 사실을 말해주었다.
'인사총무부'와 '전략기획부' '책임자'들께서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참 많은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 풍경 2.
어제 출근을 하니 책상에 다면평가 관련 서약서가 놓여있었다. 바야흐로 승진의 시즌이 왔다는 종이 한 장이었다. 서약서에는 승진후보 대상자에 대한 다면 평가를 함에 있어 그 어떤 편견 없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임한다는, 그리고 그 사항을 어길 경우 어떠한 처벌도 감수할 것을 서약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 서약서에 사인을 하면서 나는 늘 편견 없이 공정했는데 처벌은 왜 내가 받는 것 같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 직급도 위 직급을 평가한다는 다소 진보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이 다면평가의 결과는 승진에 그 어떤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실은 회사의 김대리도 알고 박 과장도 알고 이 차장도 안다.
어쨌든 이 요식적인 평가서를 작성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이번 과장 승진은 단 한 명뿐이라 기대조차 하지 않았고, 이제 이런 이벤트는 더 이상 내 세상 것이 아니기에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내 이름은 승진후보대상자에도 없었다. 나와 친한 후배 이름이 거기 적혀 있었다. 웃음이 났다. 어차피 그 후배도 들러리였지만 나는 이제 병풍 조차 안되었다. 하필 어제저녁 나는 그 후배와 저녁 약속이 되어있었다. 착하고 여린 후배가 그 공지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이 뻔해 평가를 마치고 말을 걸었다. 저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약속대로 우리는 오늘 저녁 맛있게 먹는 거라고.
안 그래도 후배는 다른 선배로부터 김대리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네 이름이 들어가서 서로 민망한 분위기 조성하는 이 회사 뭐냐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말 걸기 전까지 나와의 약속이 취소될까 걱정하고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어제 예정대로 그 후배와 같이 저녁을 먹었고, 예쁜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그리고 둘이 함께 (원래 약속이 되어있었던) 한 대표님으로부터 두 시간가량 생생한 경험담과 소중한 인사이트를 들었다. 그분은 현재 자기 신념에 따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참으로 영리하게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계신 분이다.
# 풍경 3.
그리고 나는 내일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간다. 한두 달 전쯤 있었던 업무 관련 사례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탔기 때문이다. 최우수상도 아니고 장려상으로 요란 떠는 것 같아 갈 생각이 없었는데, 뭔 일인지 담당부서 직원이 두 번 씩이나 전화로 시상식 참석여부를 물어왔다. 다른 지역 기관의 장려상 수상자도 서울까지 상을 받으러 오냐고 물어봤더니 참석한다고 하여 차장님과 지점장님께 보고 드리고 간다고 했다. 사실, 나는 매년 있는 이 공모전에 참가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조용히 모른 체하고 있던 어느 날 (매번 나에게 존댓말로 말을 거시는) 젠틀한 우리 지점장님이
"김대리, 우리 지점은 그 공모전에 사례 잘 냈나요?" 물어오셨다. 이 한 말씀에 맘이 약해져 한 시간 만에 뚝딱 작성해서 제출했다. 그리고 공모전 참여율이 워낙 저조했는지, 생각지도 못한 상 하나가 우연히 얻어걸렸다.
회사를 다니면 기이한 인과관계를 갖는, 어디 가서 말하기도 버거운 풍경들이 참 많이 펼쳐진다. 그리고 나는 10년 차 직장인답지 않게 이런 풍경들에 여전히 적응을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