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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을 가르치는 대리

by 앤디



2020년이 되고 갑자기 회사의 과장이란 이름이 없어지고, 모든 과장을 차장으로 변경한다는 '직위'에 관한 공지가 떴다. 직위에 맞는 업무태도, 업무능력이 중요한 것이지 과장이든 차장이든 그 명칭이 뭐 그리 중요할까 싶어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 공지를 바라보게 됐다.



그리고 연초에 있었던 인사이동 끝에 내 결재라인의 과장님, 아니 차장님도 바뀌었다. 참고로 그분은 내가 몇 년째 해온 업무를 (그분의 근무기간인) 십몇 년 동안 사실상 해본 적이 없어 내 업무를 잘 모르시는 분이다. (참고로 지금 내 업무는 회사 주요 업무 두 가지 중 하나다...) 개인적으로 같은 업무를 오래 한 것도 지겹고 다른 업무를 서서히 잊어가는 것 같아 업무분장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자리에서 지점장님께 현 업무가 아닌 다른 업무를 하고 싶다 말씀드렸다. 지점장님은 내 업무에 대해 사실상 아는 게 없는 그 차장님을 내 결재권자로 만들어놓고, 나에게 이 업무에 대한 베테랑이 한 사람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다소 납득하기 힘든 궤변을 늘어놓았다. 내가 나 스스로를 이 업무에 대한 베테랑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베테랑을 제일 밑에 두고 업무에 대해 아는 것 없는 책임자들이 결재하는 회사가 세상천지 어딨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말해봤자 나에 대한 뒷말만 나올 것이 뻔해 일단 말을 말았다.







업무분장이 끝나고 그렇게 나는 결재권자를 가르치는 대리가 되었다. 최근 몇 년간 어디다 말하기도 힘든 일들이 회사에서 벌어져 이런 상황에 대한 피로도가 이미 상당했는데 하다 하다 이런 일의 주인공까지 될 줄은 몰랐다.

어쩌다 나에게 일을 배우게 되신 그 차장님께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이번에 그 분과 처음 일해 보기 때문에 지금까지 회사 행사에서 인사만 주고받았던 사이다. 그런데 그 차장님의 질문이 거듭될수록 표정관리가 점점 힘들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근속연수가 20년이 돼갈 동안 주요 업무 중 하나를 이 정도로 모르는 자가 '차장'이란 것도 신기하고, 주요 업무를 모르는데 승진시켜 결재권자를 만들어주는 회사도 이상하고(이건 비단 그분뿐만이 아니라 그 사례가 더 많긴 하다), 지점 내에 다른 책임자와 직원들이 있는데도 이런 식의 업무분장으로 이런 상황을 연출하는 '지점장'의 리더십도 기가 막히다.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지 못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회사가 또 한 번 보여주었다. 이왕 나갈 거면 어서 빨리 나가라고 회사로부터 퇴사 응원용 종합 선물세트(?)를 받은 기분이다.

회사를 다니기 전에 나는 누군가의 직위가 높으면 혹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마도 직위라는 것이 그 사람의 업무능력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여 그 이름값을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회사를 다니고 나서부터는 직위만으로 누군가를 단정 짓는 일은 철저하게 사라졌다. 직위에 걸맞은 사람일 수도 있고 전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올해 나는 입사 10년 차 '대리'주제에 결재를 올릴 때마다 감히 '차장'을 가르치고, '지점장'에게 설명하는 건방지고도 정신 나간 이름값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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