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구워 먹은 김대리의 오후 반차

by 앤디


회사에 대해 같은 오해를 했다가 회사에 대해 같은 결론을 내리고 결국 회사 밖의 인생을 계획하기로 한 최대리와 나는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기로 하였다.
어떤 결심을 했다 해도, 눈과 귀가 있는 이상 (떠날 공간에서 아직 못 떠난 채로 느끼는) 반복되는 실망과 어쩌지 못하는 답답함은 생각보다 참기 힘든 것이었다. 다음 주 출근과 동시에 재발할 증상이라 해도 우리는 각자 안에 있는 뭔가(?)를 달랠 시간이 필요했다.

봄바람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쌀쌀하고 강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지만, 다행히 날씨가 너무 좋았다. 우리의 목적지는 인천대교를 건너는 드라이브 코스의 영종도였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다는 제주도를 둘러싼 바다다. 다만 그곳은 평소에 훌쩍 떠날 수 없는 곳이다 보니, 차로 갈 수 있는 바다 중에 내 마음속 원픽 바다는 언제나 동해였다. 남해는 아직 볼 기회가 없었고, (인천에 산다는 이유로) 서해는 비교적 친숙하지만 개인적으로 바다의 주변 풍경이나 바다색이 늘 동해가 맘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최대리와의 짧은 나들이를 통해 내가 사는 인천 앞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이 무척 감사하게 느껴졌다. 바다는 역시 바다였기 때문이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터라 최대리와 나는 배가 몹시 고픈 상태였다. 일단 배부터 채우기로 하고 바다가 보이는 전망을 가진 조개구이집으로 들어갔다. 시장기도 상당했고 원래 해산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바다를 보며 구워 먹는 조개는 정말 맛있었다. 잘 구워진 조개를 먹을 때마다 입안 가득 바다 내음이 풍기자, 조개를 구워 먹는 게 아니라 바다를 구워 먹는 느낌이 들었다. 해물 팍팍 들어간 칼국수로 마무리까지 한 뒤, 빵과 커피가 들어갈 뱃속 공간을 위해 잠시 바닷가 산책을 하기로 했다.



바람이 강해서일까 파도가 힘차게 치며 내는 소리도 그 여느 때보다 크게 느껴졌다.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있으니 사무실 안에서 가졌던 분노와 답답함이 하찮게 느껴졌다. 나이 들수록 자연이 좋아지는 것에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자연 앞에 섰을 때 일상의 모든 번뇌가 사소하게 여겨지는 것도 크다. 비록 일상에 복귀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되살아난다 해도 말이다.

물론 바다라 해서 좋은 것만 준 건 아니었다. 왜 죽었는지 모를 갈매기 시체를 갑자기 본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무서울 정도로 모래사장을 가득 채운 갈매기 떼와 신발 속으로 들이치는 모래 덕에 산책을 중도 포기해야 했다.
그래, 너무 다 좋기만 했으면 현실감이 떨어질 뻔했는데 역시 그랬다.

최대리와 밥을 먹으면서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서로 얘기를 나누긴 했는데 본격적으로 수다를 확장시키기 위해 마시안 해변의 카페로 향했다. 최대리와 얘기하는 내내 10년 동안 회사도 변했지만, 우리도 참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스스로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왜 이렇게 됐을까 백날 생각해봤자 바뀌는 건 없으니, 변했으면 변한 채로 우리의 다음 경로를 고민하면 될 일이다. 어쩌면 모든 것이 숨 가쁘게 바뀌는 세상에서 우리 인생만 고대로 일거라고 생각한 것부터가 과욕이었다. 우리 40대에는 꼭, 지금과는 다른 자리에서 다른 이야기를 나누자며 서로의 다짐을 재확인하고 결심을 응원한 뒤 카페를 나왔다.





짠 것도 아닌데 우리가 일어선 시간이 퇴근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떠나기 전, 아쉬운 마음에 카페 뒤편 바다에 눈을 두니 해가 뉘엿뉘엿 지려 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평소와 다른 풍경에서 보낸 몇 시간의 힘은 생각보다 컸다. 최대리도 만족스러웠는지 앞으로도 종종 이런 시간을 가지자고 했다. 회사에 이런 최대리가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나들이로 경로 '이탈'이 아닌 경로 '변경'의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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