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상사한테 아저씨라고 하게 될까 걱정

by 앤디


구정 연휴 이후로 긴 휴가를 맞았다. 코로나 19 사태가 없었다면, 행여 이 찬스를 놓칠세라 캐리어를 끌고 어디든 떠났을 테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그리고 어차피 내게는 이번 연휴 동안 하려고 벼르고 벼른 것이 있었다. 엄마 생신 등의 가족 행사, 강아지 목욕을 시킨 시간을 빼고 나는 연휴 내내 집에 틀어 박혀 쌓아 둔 신문을 읽었다.

신문을 읽는 동안 내 개인적인 불안에 사회와 세상의 불안까지 읽는 기분이 들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나아가야 하는 게 맞는 건지 사소한 실마리라도 찾는 심정으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필요한 내용을 분야별로 정리해서 스크랩을 해놓는 과정에서 유독 '리더'를 언급하는 칼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얼마 전의 선거와 혼란스러운 시국의 영향인 듯했다.

글쓴이들이 제시하는 참으로 이상적이고 정상적인 리더상에 그래, 이거지 밑줄까지 그어가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연휴 직전 중간 책임자인 차장님을 통해 들은 현 지점장님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 코로나로 인해 지금 회사는 너나 할 것 없이 바빠졌데)

평소 각자 맡고 있었던 일의 양 대비 두 배 이상씩 늘어나 대부분의 직원들이 야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지점장이 차장에게 한 말이란, 본인이 해야 할 일이 많아져 너무 힘들다며 '본인이 해야 할 그 일'을 지점 직원에게 나눠서 매일 10건씩 처리하게 하면 안 되겠냐는 것이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한 달 전쯤에도 본인 일을 직원들에게 다 떠넘겨 직원들에게 부담과 분노를 선사한 지점장이었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 직원들이 지점장의 일까지 떠안아 전부 남아 야근하는 동안 그는 누구보다 일찍 집에 가는 리더의 뒷모습을 보여줬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뒷목이 뻐근해지고, 혈압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곧바로 나는 차장님께 그래서 뭐라고 하셨냐고 물었다. 차장님은 정색하면서 지금 지점 내 직원 모두 바빠서 누구 하나 그럴 여력 있는 사람이 없다고 대답했다고 했다. 저번에도 그렇게 시키셔서 결국 이도 저도 못한 직원들이 생기지 않았냐고 말이다. 그러자 지점장은 10건이 안되면 5건이라도 해주면 안 되겠냐고 했다고 한다.

진짜 참, 너무, 눈물겹게 구질구질했다.

그런 말을 내뱉는 지점장도, 그런 말을 듣고 앉아 있어야 하는 나도 이 모든 상황이 짜증 났다. 하필 점심 먹기 전에 그 소리를 들은 나는 결국 점심을 먹고 체하고 말았다.






이 회사에서 현 지점장의 업무 능력을 모르는 직원은 아마도 신입직원들 정도일 것이다. (어쩌면 같이 일한 신입직원은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현 지점장의 승진 배경과 현 지점의 지점장으로 발령받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고도 경악을 금치 못했었는데, 하루 걸러 이틀 꼴로 이런 작태를 코앞에서 보고 있자니 몸과 정신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어떤 이의 승진은 일차원적인 분노와 억울함을 넘어서, 조직에 대한 일말의 신뢰마저 한 방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이 분의 승진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리더'로서 더 큰 일을 구상하고 해내느라 잡다한 일들이 내려오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국 본인 일이라는 게 직원들에게 나눠줘도 될 정도의 수준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모자라, 그 마저도 못하겠다고 징징거리는 내가 출근하는 곳 리더의 현주소.


그냥저냥 보낸 세월도 실력이라고 연공서열의 폐해를 온몸 다해 선보이면서도 턱턱 자리를 꿰차고 과분한 월급이 통장에 꽂히는 그는... 전생에 (정말 그렇게 안 생겼는데) 나라를 구하기라도 한 걸까.






요즘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신문의 한 칼럼에서도 사회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를 설명하며 정신분석학자 김혜남의 '당신과 나 사이'라는 책의 내용을 소개했다. 사람 간의 물리적 거리를 통해서도 심리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데 회사 동료들 사이는 1.2m가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저런 상사를 계속해서 지점장님이라고 불렀다가는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적합한 거리두기에 영영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본인일을 떠넘길 운을 띄운 지점장이 수일 내에 (본인의 고통만 덜어내는) 기이한 고통분담을 내세우며 5건 드립을 칠지도 모르겠다.

그럼 나는 나의 거리두기를 위해 이렇게 대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 지점장... 님, 아니...'아저씨' 그건 아저씨 일이세요."


마음의 소리를 사무실 안에서 찐으로 내뱉게 될까 봐, 걱정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