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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n 02. 2020

나 혼자 산다를 보다 기안 84에게 사과를 했다


저번 주 금요일 저녁, 부부의 세계를 본방 사수하느라 보지 못했던 나 혼자 산다를 오랜만에 시청하게 되었다.

 아, 나는 내 주말 저녁을 이제 어느 세계에 기대야 하는 것인가 통탄하며 어 프로에도 눈을 못 붙이고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 원래도 좋아했던 예능프로인데 마침 또 내가 좋아하는 개그우먼 박나래 영상이 나와 '나 혼자 산다'를 보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몹시도 좋아한다는 발리 분위기로 새 집을 꾸미는 그녀의 영상은 역시나 재밌고 유쾌했다. 한창 깔깔대면서 보고 있는데 화면이 바뀌면서 기안 84의 영상이 이어졌다. 순간 찬물이 확 끼얹어진 느낌이 들어 채널을 돌려버릴까 잠시 망설였다.







 사실 나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웹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고, 나 혼자 산다에서 비치는 그의 행동은 내겐 그저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 프로에서 그의 영상이 매번 시청자로서의 내 집중력을 흩트렸기에, 어울리지도 않는 사람이 왜 저런 인기 프로에 나올까 하는 생각했었다.

 

기안 84의 영상은 그의 일터에서 시작되었다. 퇴사하는 직원을 위해 송별회를 제안하는 그의 말은 이미 계획이 있던 직원들의 스케줄로 한 방에 묻힌다. 6시가 돼서 모든 직원들이 칼퇴를 하고 작품의 창작자이자 최종 책임자인 그만 혼자 사무실에 남아 작업을 한다. 꼬박 작업에 몰두하다 잠시 환기하려고 창문을 열자 동네 개가 그를 향해 앙칼지게 짖는다. 개가 짖었던 이때부터였을까. 어느새 나는 그토록 별로였던 그의 영상에 푹 빠져들고 있었다.


 





 (그의 표현대로) 어질어질해져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그가 맨발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집에 가는 퇴근길을 볼 때까지만 해도 나는 피식거리고 있었다. 가로등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혼자 삑사리를 내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 동네 개란 개가 다 나와 그를 향해 짖어대는 장면이 진짜 웃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맥주를 고르고 계산을 하는 장면에서 편의점 주인분이 쿠폰이 다 모였으니 닭다리를 가져가야 한다는 그때부터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편의점 닭다리를 많이 사 먹었다고 닭다리 인형이라는 1차원적인 사은품이 등장해서 웃기긴 웃겼는데, 닭다리 인형에서 진정성을 느껴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가 집에 돌아와 편한 반바지를 걸쳐 입고 기이한 레시피로 도시락을 요리하는 장면부터는 아예 웃음기가 가시었다. 그러다 그가 밥 한 숟갈에 외로움과, 술 한 모금의 고독과, 멍 한 줌의 쓸쓸함을 구현할 때 어느새 나는 울고 있었다.
(다행히도 마루에는 나 혼자였다.)







 고시 공부 때문에 몇 개월 신림동에서 살았을 때를 제외하고 나는 지금껏 혼자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의 영상은 뭐야 저거 완전 내 얘기잖아 하며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치장하고 다니지만 (나만 아는) 늘어질 대로 늘어진 속옷과 구멍 난 잠옷,

 누가 봐도 먹기 아까운 관상용 밥상 사진 몇 장쯤은 핸드폰에 있지만 실제 내 일상을 버티게 하고 영혼을 위로하는 음식은 사진 찍지 않는다는 뭐 그렇고 그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들킨기분이었다.






 여전히 나 하나 오롯이 책임지는데도 갈 길이 먼 인간이지만, 누구나 자기 혼자 짊어져야 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쯤은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영역에서의 무수한 시간을 어떻게 버텨내느냐가 각자 인생의 관건이라는 것도 말이다. 나는 지난 주말 기안 84에게 들리지도 않은 사과를 혼자서 했다. 몰라봐서 미안했다.
그는 그 어떤 출연진보다 나 혼자 (열심히) '산다'라는 프로그램에 어울리고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다음 영상에서는 그가 바닥이 아닌 밥상에서 밥을 먹는 걸 보고 싶다. '혼자' 살아가는 동시대의 한 사람으로서, 기안 84만의 세계를 꾸려가는 그의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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