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디 Nov 09. 2020

나의 제자리로 가는 길



정리정돈에 취약한 나는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개념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 부족함은 불행하게도 나 자신을 '제자리'에 두지 못하는 결과도 낳게 했다.

 지난 월요일, 수업시간에 성격장애에 대한 내용을 배우다가 교수님이 자기 성격을 진단하는 테스트 하나를 알려 주셨다. 10개의 문항에 대답을 끝내고, 알려주신 방법대로 계산을 하고 나니 다섯 가지 성격 유형에 대한 나의 점수가 나왔다. 각 유형별 점수가 내 예상과 거의 맞아떨어졌는데,  생각보다 나의 성실성 점수가 높은 점이 좀 놀라웠다. 혹시나 이 일말의 성향이 재미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반복되는 업무를 10년 넘게 버티게 만든 장본인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 가지의 성격 유형 중 점수가 유독 높은 두 가지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 그 해당 유형에서 보이는 행동 예시 중 내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그저 다른 길이라는 이유로 한 번도 안 가본 길로 집에 가보기'
 
 순간 가슴이 뛰었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데는 낯선 장소에서 마주하는 온갖 설렘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평소와 다른 길로 집으로 돌아가는 그 여정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아, 내가 하는 짓이 결국 나였구나 했다가 회사에서는 (점수 높은) 두 유형의 성격이 발현될 일이 결코 없구나 하는 깨달음이 함께 찾아왔다. 선보일 일도 없지만, 우연히 삐져나갔다한들 정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었다. 나는 나를 어디에 두어야 제자리에 놓게 되는 걸까, 순식간에 마음이 답답해지고 슬퍼졌다.







 저번 주말, 몇 주전부터 약속한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업을 마치고 친구가 사는 김포로 향했다.  신촌에서 인천이 아닌 김포를 가보는 건 처음이라 티맵 어플을 켰다. 1년도 더 된 시간 동안 못 봤던 친구를 본다는 반가움도 컸지만,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에 신이 나기 시작했다. 친구 집으로 가는 내내 나는 우측에 한강을 두고 달렸다. 이래서 한강, 한강 하는 건가,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가 비싼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보이기는커녕 그 근처에 살지도 못하지만 한강을 보면서 운전하는 것만으로 정체모를 뿌듯함에 사로잡히는 건 기분 탓이었을까. 전혀 안 가봤던 길로 갈 때 좋아 죽는 것도 나지만, 속세의 진부하고 뻔한 성공 도식에 자유롭지 못한 것 또한 나였다.






 연말 혹은 명절과 같은 공휴일도 아닌데 평소 다니던 길이 말도 안 되게 막히는 때가 있다. 엉금엉금 기어서 가다 보면 앞에 영락없이 접촉사고가 나 있다. 내가 멈춰있는 지점부터 사고가 난 지점까지 빠져나갈 다른 길이 없어서, 밀려 밀려 그 사고 지점을 반드시 지나쳐야 쌩쌩 달릴 수 있는 그런 상황. 내가 지금 딱 그런 지점에 놓여 있는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친구를 보러 가는 초행길에서는 특별한 정체도 사고도 없었는데, 수업을 가기 위해 늘 다니는 도로가 지난 주말 유독 막혔다. 아무리 가도 접촉사고의 현장은 보이질 않았는데 좀처럼 정체구간이 해소되지 않았다.
 역시나 꽉 막혀있는 지하차도에서 '나의 길'에 대해 생각하며 천천히 앞으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쾅 소리가 났다. 처음에 나는 내 차바퀴가 터진 줄 알았는데, 뒤차가 내 차를 박은 것이었다. 소리에 놀란 건지 충격이 있었던 건지 사고 당일부터 지금까지 누가 내 등짝을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긴 것처럼 통증이 밀려다. 덕분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귀찮음이 생겼지만, 심정적으로는 정신이 번쩍 나는 기분이 든다.  

 어떤 고민이 끝끝내 정신적인 충격만으로 해결이 안 될 때는 물리적인 충격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이 정도로 끝나서 이런 생각도 하는 거겠지.  


 어깨와 등짝이 또 쑤셔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르게 살기 딱 좋은 계절, 가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