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디 Oct 29. 2020

바르게 살기 딱 좋은 계절, 가을


어김없이 계절은 변했고, 가을의 무드는 깊어가고 있다.

내 주변에서도 가을을 타고, 우울감을 호소하는 몇 명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난주 금요일, 출장으로 청주에 다녀왔다. 돌이켜보니 사십 평생 가까이 밟아본 적 없는 땅이라 여행 가는 기분으로 운전대를 잡았는데, 출발부터 길은 막혔고 생각보다 너무 멀었다.  보통 지방 출장을 떠나면 맛집을 검색하고, 밥 한 끼 정도는 그곳에서 먹고 오는 것이 나만의 관례였지만 웬일인지 이번에는 빨리 용무를 끝내고 돌아가고만 싶었다.

 평소보다 일 처리시간도 좀 길어졌다 느꼈을 때쯤 일이 끝났고, 다시 또 먼길을 떠나야 하는 조급함에 빨리 걷고 있을 때였다. 들어올 땐 못 봤는데 주차장 옆의 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발이 멈춰줬고, 가을은 참 예쁜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일들로 일상의 변화가 큰 지금,  '어김없이' 스며든 가을의 공기, '잘 아는' 울긋불긋한 가을의 색깔이 그래서 더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의 10월 풍경은 참 예쁘구나 하는 기억을 담고 인천으로 돌아와 얼음컵에 고량주를 따라 마셨다.


 눈물이 난다는 측근들의 가을에 대한 소감과는 결이 다르게 나의 가을은 분노로 눈물이 난다. 10년 넘게 회사를 다녔기에 이젠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인적 구성, 기대감 없는 인사배치였다. 그래도 역대 최악의 콜라보라는 것은 또 있었다. 고작 삼십몇 년을 살고서 인생에 대해 아는 체할까 봐 삶은 꼭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준다. 덕분에 나는 삼재라는 것이 정말 9년 주기일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품게 되었고, 전생에 나는 나라를 팔아먹을 정도의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러 이생에서 그 업을 (하필 이 회사에서) 갚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지난 월요일 나는 6시 땡 퇴근을 하고, 7시 10분 전 신촌역 출구에 있었다. 평일 저녁에 신촌을 서성이니 기분이 몹시 흥분되고 설레었다.  신촌은 나의 이십 대 흑역사와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추억들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곳이다. 남들보다 유독 더 학교를 오래 다닌 탓일까. 신촌에 가면 지리적 고향이 아닌 정서적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교육 장소가 마침 학교와 가까워 수만 번 지나쳤던 신촌역 출구를 빠져나와 역시 너무 아는 길을 재빨리 걸었다.

어떻게 해서든 수업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칼퇴를 하고 전철 배차시간을 탁탁 맞춰 뛴 바람에 다행히 수업 시작 3분 전에 강의실에 도착했다. 거의 매일 분노를 유발하는 최악의 지점이지만, 지하철역에 가까이 있어 서울에 빨리 올 수 있었단 사실에 처음으로 이 지점에서 일하는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수업은 기대만큼, 아니 기대 이상이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나의 월요일이 이런 분위기를 자아낼 수도 있었던가. 교수님은 이 좋은 가을날 저녁에  범죄에 관해 공부하겠다는 여러분도 정상은 아니라고 농담을 건네셨지만, 나는 나의 하루가 이렇게 마무리되는 것에 충만함을 느꼈다.  

 완벽해서 더 귀한 월요일. 집으로 가기 위해 다시 신촌역으로 가고 있는데 한 풍경과 글귀가 내 마음을 때리었다. 범죄에 관련된 내용을 잔뜩 듣고 돌아간 길이라 더 눈에 띄었던 것일까.  나도 모르게 잠깐 서서 몇 초간 바라보았다. 평일의 사무실 안. 저 말을 미치도록 내뱉고 싶었던 몇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요즘따라 부쩍 무너지고 휘둘린 내 하루하루에 던지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어김없이 찾아온 가을의 풍경, 전혀 기대치 않았던 가을의 한 장면에서 분노와 눈물 대신 어떤 다짐을 해본다.

이 가을, 나는 바르게 살고 싶다. 그러니까 바르게 살자.

 


매거진의 이전글 선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