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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Nov 30. 2020

선배의 희망고문


 벌써 1년 전의 일이다. 회사에 대한 입장 정리를 끝낸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두고 고민하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문제는 어려웠고, 정답은 그 어디에도 없었기에 무엇을 해도 신통치 않았다.


 그리고 딱 이맘때, 강의 제목만 보고 혼자서 오해하고 착각해 광화문으로 한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모든 부분에서 내 예상과 철저하게 비껴간 수업이었지만, 나는 거기서 회사원으로서의 내 위치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수강생의 대부분은 업종 불문 사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몇 분 계셨고, 공공기관에 다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수업이 끝나고 질문을 하거나 조별 토론을 할 때마다 나는 나 혼자 맥락을 파악 못하고 헛다리를 짚는 건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것은 비단 내 분야가 아닌 데서 오는 위축감만은 아니었다. 회사는 달라도 직급이나 근무기간이 비슷한데, 김대리인 내가 날리는 질문과 다른 수강생들이 파고드는 질문이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아, 같은 대리인데 왜 나는 저들과 다르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세상 물정을 모른 채 나이만 훅 먹어버린 느낌, 김대리로서 해왔던 내 업무란 것이 회사 밖에서 보니 미천하고 듣보잡이기 짝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내 옆에 앉은 분과 명함을 주고받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되었다. 명함을 보던 그분이 내게 말했다.

 공공기관에 다니시는 것 같은데 그곳에 젖어 있지 않고, 이런 수업도 들으러 다니시고 대단하세요. 그때 나는 우리 회사를 아세요?라고 되물었다. 그분이 알죠, 저 취준생일 때 은행 취업 준비한 적 있어서 알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분은 나와 같은 대리였는데 나로 하여금 일을 향한 열정과 애정, 일의 프로페셔널함을 늘 돌이켜보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분이 하는 일을 정확히는 몰라도 질문을 할 때마다 본인 일에 대해 상당히 진지하고 욕심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었다. 바로 이런 자극 때문에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사이에 나를 놓아두기를 자초했지만 내 위치의  뼈를 때리는 것은 언제나 아픈 것이었다.






 
 이제 몇 달 뒤면 인사이동 시즌이 돌아온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희망부서를 조사하는 설문이 날아올 것이다. 회사에 대한 나의 스탠스는 변함이 없지만, 나갈 때 나가더라도 한 번쯤은 나스러운(?) 일을 한번 해보고 나가고 싶다는 야무진 바람을 갖고 있다.

 많은 후배 직원들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이자 상사인 분이 저번 달일 때문에 내가 일하는 지점을 방문하셨다가 회사에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희망을 심어주고 가셨다.   

   

 나는 전생에 죄가 많아 이 회사에서 일하는 10년 동안, 단 한 번도 그 분과 일을 해본 적이 없고 개인적으로 친분도 없다. 그런데 그분과 대화를 나누기만 하면 이미 다 죽어버린 회사에 대한 상식적인 기대와 포부들이 꿈틀거린다.

 그 선배가 인사이동과 승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다가 나에게 이런 말씀을 말씀하셨다. 김대리, 다음에 인사이동 희망부서 쓸 때, 땡땡땡 부서 한번 써보는 게 어때? 김대리 가면 엄청 잘할 것 같은데.


 회사에 있어서는 철저히 헛된 희망을 집어삼키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여기 사람들 대다수는 나같이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하고 주어진대로 하려고 하는데, 김대리는 안 그렇잖아?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일을 해도 떨지 않을 것 같고, 김대리 말에는 또 힘이 있으니까 진짜 다음에 땡땡땡 부서 가서 맘껏 펼쳐.


 선배의 말을 듣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아, 이분은 나랑 같이 일도 안 해보고, 대화도 많이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나에 대해 이렇게 잘 아시지? 하는 놀라움, 나는 여기에서 그 어떤 미련과 기대를 다 버렸는데 왜 이제와 나를 흔드세요? 하는 원망스러움이 왔다 갔다 했다.

 어쩌면 별생각 없이 던지신 말일 수도 있는 선배의 그 말은 그 뒤로 계속 나에게 남게 되었다. 그 영향은 예상보다 커서, 어차피 여기서는 더 실망할 것도 없는 거 밑져야 본전 (내가 희망해서 보내주기만 하면) 그 부서에 가서 원 없이 주도적으로 일 좀 해봤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나는 내년에 전혀 엉뚱한 부서에 가서 지금과 똑같을 수도 있고, 희망 부서에 가서 아, 그럼 그렇지 실망할 수도 있다. 아니면 희망 부서에서 선배의 말처럼 진짜 뭔가를 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상황이면 좋겠다. 나도 한 번쯤은 이 회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재밌게 일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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