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년 전의 일이다. 회사에 대한 입장 정리를 끝낸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두고 고민하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문제는 어려웠고, 정답은 그 어디에도 없었기에 무엇을 해도 신통치 않았다.
그리고 딱 이맘때, 강의 제목만 보고 혼자서 오해하고 착각해 광화문으로 한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모든 부분에서 내 예상과 철저하게 비껴간 수업이었지만, 나는 거기서 회사원으로서의 내 위치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수강생의 대부분은 업종 불문 사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몇 분 계셨고, 공공기관에 다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수업이 끝나고 질문을 하거나 조별 토론을 할 때마다 나는 나 혼자 맥락을 파악 못하고 헛다리를 짚는 건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것은 비단 내 분야가 아닌 데서 오는 위축감만은 아니었다. 회사는 달라도 직급이나 근무기간이 비슷한데, 김대리인 내가 날리는 질문과 다른 수강생들이 파고드는 질문이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아, 같은 대리인데 왜 나는 저들과 다르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세상 물정을 모른 채 나이만 훅 먹어버린 느낌, 김대리로서 해왔던 내 업무란 것이 회사 밖에서 보니 미천하고 듣보잡이기 짝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내 옆에 앉은 분과 명함을 주고받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되었다. 명함을 보던 그분이 내게 말했다.
공공기관에 다니시는 것 같은데 그곳에 젖어 있지 않고, 이런 수업도 들으러 다니시고 대단하세요. 그때 나는 우리 회사를 아세요?라고 되물었다. 그분이 알죠, 저 취준생일 때 은행 취업 준비한 적 있어서 알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분은 나와 같은 대리였는데 나로 하여금 일을 향한 열정과 애정, 일의 프로페셔널함을 늘 돌이켜보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분이 하는 일을 정확히는 몰라도 질문을 할 때마다 본인 일에 대해 상당히 진지하고 욕심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었다. 바로 이런 자극 때문에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사이에 나를 놓아두기를 자초했지만 내 위치의 뼈를 때리는 것은 언제나 아픈 것이었다.
이제 몇 달 뒤면 인사이동 시즌이 돌아온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희망부서를 조사하는 설문이 날아올 것이다. 회사에 대한 나의 스탠스는 변함이 없지만, 나갈 때 나가더라도 한 번쯤은 나스러운(?) 일을 한번 해보고 나가고 싶다는 야무진 바람을 갖고 있다.
많은 후배 직원들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이자 상사인 분이 저번 달에 일 때문에 내가 일하는 지점을 방문하셨다가 회사에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희망을 심어주고 가셨다.
나는 전생에 죄가 많아 이 회사에서 일하는 10년 동안, 단 한 번도 그 분과 일을 해본 적이 없고 개인적으로 친분도 없다. 그런데 그분과 대화를 나누기만 하면 이미 다 죽어버린 회사에 대한 상식적인 기대와 포부들이 꿈틀거린다.
그 선배가 인사이동과 승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다가 나에게 이런 말씀을 말씀하셨다. 김대리, 다음에 인사이동 희망부서 쓸 때, 땡땡땡 부서 한번 써보는 게 어때? 김대리 가면 엄청 잘할 것 같은데.
회사에 있어서는 철저히 헛된 희망을 집어삼키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여기 사람들 대다수는 나같이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하고 주어진대로 하려고 하는데, 김대리는 안 그렇잖아?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일을 해도 떨지 않을 것 같고, 김대리 말에는 또 힘이 있으니까 진짜 다음에 땡땡땡 부서 가서 맘껏 펼쳐.
선배의 말을 듣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아, 이분은 나랑 같이 일도 안 해보고, 대화도 많이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나에 대해 이렇게 잘 아시지? 하는 놀라움, 나는 여기에서 그 어떤 미련과 기대를 다 버렸는데 왜 이제와 나를 흔드세요? 하는 원망스러움이 왔다 갔다 했다.
어쩌면 별생각 없이 던지신 말일 수도 있는 선배의 그 말은 그 뒤로 계속 나에게 남게 되었다. 그 영향은 예상보다 커서, 어차피 여기서는 더 실망할 것도 없는 거 밑져야 본전 (내가 희망해서 보내주기만 하면) 그 부서에 가서 원 없이 주도적으로 일 좀 해봤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나는 내년에 전혀 엉뚱한 부서에 가서 지금과 똑같을 수도 있고, 희망 부서에 가서 아, 그럼 그렇지 실망할 수도 있다. 아니면 희망부서에서 선배의 말처럼 진짜 뭔가를 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상황이면 좋겠다. 나도 한 번쯤은 이 회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재밌게 일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