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가면 살이 빠진다, 대학에 가면 남자 친구가 생긴다. 참으로 황당한 인과관계를 지닌 가정법 구문이다. 조금 더 디테일한 구라로 10분만 더 공부하면 신랑 얼굴이 바뀐다는 말도 있었다. (10분을 더 공부하면 시험을 잘 볼 가능성이 커진다. 음... 신랑의 얼굴은 영영 확인 못할 수도 있다)
분명한 건, 대학에 가면 그냥 대학생이 된다.
그럼에도 대학을 가기 전에는 저 어처구니없는 명제에 기대서 공부에 매진한 때가 있었으니, 창피하지만 저 말을 믿었음을 인정한다.
대학에 갔더니 당연히 살은 빠지지 않았고, 남자 친구도 대학의 영향력이 상당히 미미할 때 생겼다. 살은 식이요법 및 운동을 병행해야 빠지는 것이었고, 남자 친구는 만남의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생기는 것이었다. 대학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라고 만들어진 저 솔깃한 보상들은 대학이라는 만능 치트키(?)와 상관없이 각각의 다른 노력들이 선행되어야 주어지는 것이었다.
살면서 어떤 과정을 통과할 때 힘을 얻으려고 기댔던 시쳇말들은 진짜 그 단계에 도달한 순간, 싹 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잊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아 내가 속았구나 바보 같은 나 자신만 발견하기 때문이다.
저런 말에 한 번 당해봐서였을까.
그 뒤로 어떤 과정을 버티기 위한 자가 응원용 문장들을 아무리 찾아보려 애써도, 나에게 먹히는 가정법 구문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어른이 된 시점은 저런 문장에 속지 않는 때부터였던 것 같다.
돌이켜 보니, 회사에 가면 ~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다른 길을 기웃거리느라 친구들에 비해 늦게 회사에 들어간 나는 '회사에 가면'이 아닌 '회사에 가보니' 하는 친구들의 말을 더 많이 들었다. 회사에 가기 전의 나는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에 대해 꽤 흥미로워했었다.
어느 회사나 또라이가 있는 건 불멸의 법칙이거든, 그런데 그 또라이가 회사에 없잖아, 그럼 내가 또라이인거야.
그땐 참... 내 일 아니라고 야, 진짜 웃긴다 크크크 이랬었다. 회사에 오고 10년도 더 된 지금 나는 저 법칙을 두고 감히 웃지 않는다.
요즘 자꾸 저런 ~하면 류의 문장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아무래도 말이 안 되는 문장에 기대 한 목표에만 매진했던 그때가 그리운 것 같다. 마음속에 품은 동력을 어떻게든 잃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 나가고 싶은데, 나를 둘러싼 온갖 잡음에 그제도 어제도 너무 쉽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