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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Dec 14. 2020

사나이 가는 길



 대학 때 거의 매일을 함께 술을 퍼 마신 선배 무리가 있었다. 그 무리 중 한 선배의 아버지는 군인이셨고, 선배 역시 군인이 되기 위해 육사를 준비했다가 우리 학교에 왔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그 선배는 ROTC로 복무하다가, 직업 군인이 되었다.

 그 선배는 말을 할 때마다 항상 사나이가 말이야 하면서 사나이란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다. 맨 정신일 때도 늘 사나이를 외쳐댔는데 술을 마시면 그 사나이란 말이 더 크게 들렸다. 솔직히 그 선배의 사나이 레퍼토리는 친한 우리 무리조차 상당히 지긋지긋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늘 있던 술자리가 있던 어느 날, 그 날은 하필 내가 그 선배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오늘 술자리에서는 내 귀에 피가 날 차례라는 걸 직감했고, 술자리의 희생양으로서 나는 오늘 나의 운세에 대해서 원망했다. 생물학적으로 사나이도 아닌 데다가, 사나이 가는 길에 관심 조차 없던 나는 이 오빠가 또 언제 사나이 드립을 시작해 내 흥을 깰지 기다리고 있었다.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쯤, 역시 선배의 사나이 타령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날 그 선배가 평소와 달리 목소리를 낮추더니 내게 작은 소리로 말을 걸었다.


 야, 너 내가 왜 자꾸 사나이, 사나이 거리는지 알아? 몰라. 왜 그러는데. 나는 진짜 사나이답고 싶은데, 내가 사나이 답지 못하다는 걸 너무 잘 알거든. 원래 사람은 자기에게 부족한 것, 자기에게 없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하는 거야.


 나는 그때 그 선배를 처음으로 다른 눈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그 뒤로 선배의 사나이 타령이 갑자기 꽃노래로 바뀌었다 뭐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선배가 사나이를 운운할 때 아 저 오빠 또 시작이네 하는 생각은 적어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뭐가 진짜 사나이인지는 알 턱이 없지만, 그 선배의 워너비 리스트에 사나이가 있다는 그 진정성을 존중하게 된 것이다. 그 선배나 나나 그때 막 스물을 갓 넘긴 인생 풋내기였지만 본인을 사나이 답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고, 그것을 인정할 줄 아는 선배의 그 말이 두고두고 뇌리에 남았다. 만약 지금 오빠, 약 이십여 년 전에 개골목 술자리에서 나에게 이런 말 했던 거 기억나? 하고 문자를 보낸다면, 뭔 소리야  내가 그랬어? 이럴게 뻔하지만 저런 마음을 품고 있던 선배가 세월 앞에 변질되지 않았다면  나는 누구보다 그 선배가 진짜 사나이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돌이켜보니 나 역시 평소에 내게 부족한, 내가 갖지 못한 워너비에 대한 운운을 많이 하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에게 거는 긍정의 주문이었다 생각하면 생산적이고 건강한 언급이긴 한데, 한편 그것이 나의 결핍이었다고 생각하니 앞으로 말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이 함께 생긴다.


 일단 오늘 하루 동안 내가 가장 많이 언급했던 건...

상식과, 기준과,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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