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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Dec 09. 2020

나의 기준을 찾아서


 국민학교 시절, 나는 우향우 좌향좌라는 말이 그렇게 어려웠었다. 지금도 적으면서 아 역시 난해해라고 생각되는데 그때는 오죽했을까 싶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한 것은 계속 틀리는 학생이었던 나는 우향우 좌향좌를 배우는 그 시간이 몹시 싫었었다.
(대체 이걸 왜 배웠는지 의문이지만...) 그 시절 우향우! 좌향좌! 선생님의 구령과 내 몸은 꽤 자주 다르게 움직였다.

 우향우, 좌향좌를 하기 전에는 반드시 '기준'이 있다. 기준이 어디냐에 따라 내가 틀어야 할 방향이 달라진다. 비록 몸은 빠릿빠릿하게 따라주지 않았지만, 우향우 좌향좌는 기준에 따라 바뀌는 상대적인 거라는 걸 그 시절에도 금방 눈치를 챘었다. 선생님이 어떤 친구를 '기준으로 정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은 우향우, 좌향좌를 하기 전에 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내가 내 움직임을 정하기 전에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 기준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한 첫 번째 사례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되고도 한 동안은 무언가를 하기 전에 그 기준부터 찾는 것에 충실한 삶을 살아왔다. 우향우를 하든 좌향좌를 하든 '기준'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인생 초보자지만 이제 더 이상 세상의 기준에 영향을 받을지언정 무턱대고 믿지는 않는다. 세상이 표방하는 기준과 실제 통용되는 기준은 언제나 괴리가 있었고, 표방이든 통용이든 세상의 기준은 대체 누가, 언제, 어떻게, 왜 정한 건지도 의심이 들었다. 그 기준이 맞다는 것은 그 누가 장담하며, 그 거는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남이 세운 기준에 따라 우향우 좌향좌를 하고 그게 맞았네 틀렸네 하는 나는 더 이상 없다. 한 살 한 살 먹으면서 내가 가장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무턱대고 남이 세운 기준과 남이 외치는 구령에 따르는 태도다. (순간순간 흔들려도) 그것을 유지하려는 내 마음도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잡음이 많이 들려오는 시즌, 자꾸만 넘실대려는 마음을 붙잡고 싶어 삼십여 년 전의 '기준'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내 '기준'은 내가 정하고, 내가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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