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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Nov 09. 2020

맥주 마실 핑계도 가지가지



 몇 년 전쯤 아무 이유 없이 하루 연차를 내고 온종일 도서관에 틀어박혔던 적이 있었다. 어슬렁어슬렁 도서관 서고를 돌아다니다가, 꽂히는 책이 있으면 앉아서 읽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노메이크업에 안경을 쓰고 집안에서나 입을 법한 옷들을 걸치고 있었지만 길가에 핀 개나리 꽃을 보면서 나는 완성도 높은 행복감을 느꼈었다. 그날의 기분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는데, 내가 행복해지는 데 있어서 많은 돈이 필요한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해보았다.






 부모님 집에 얹혀살고, 내가 부양해야 할 가족은 나의 강아지 정도인지라 나는 혼자 벌어 혼자 쓴다. 이 말인즉슨 소비에 있어서만큼은 나의 기호와 취향이 일백 프로 반영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회사에서 받은 온갖 스트레스로 인해 뜻하지 않게 지출하는 시발 비용이 만만치는 않지만 대부분 나는 돈을 비교적 '즐겁게' 쓰고 있는 편이다.

 얼마 전에는 편의점에 가서 4개에 만원, 5개에 만원 하는 맥주를 2만 원어치 사 왔다. 봉지에는 늘 마시는 맥주와 한 번도 마셔본 적 없는 맥주들이 뒤섞였다.

그날그날 기분 상태에 따라 한 캔, 한 캔 따서 치즈를 듬뿍 찍은 나쵸칩과 함께 먹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입에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서두를 일 하나 없는 툴툴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의 행복감과 비슷했다.





 또 얼마 전에는 운전을 하고 가는데 길가에 나무가 예쁘게 물들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침 신호가 빨갛게 바뀌었고, 나는 빨간 신호덕에 빨간 낙엽이 나뒹구는 길가를 몇 초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차 안에는 (이미 다 식었지만) 평소 내가 즐겨마시는 1천 원짜리 맥카페 커피가 함께 있었다. 거기에 요즘 한창 꽂혀있는 카더가든이 오 달링, 떠나가나요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그래, 인생 뭐 별거냐 하는 평화로움을 온몸으로 느꼈다.






세상의 환가 법칙은 기를 쓰고 이해하려 해도 언제나 오리무중이다. 그런데  나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어떤 상황과 어떤 이미지는 퍽 단순하고 소박하다. 비교가 도처에 널려있는 세상에서 비교하지 않 정신승리는 자신 없지만, 비교가 없는 세상에 뚝 떨어져 지내면 나는 꽤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올해 나에게 배정된 회사 복지 포인트의 대부분을 내가 배우는 수업의 수강료로 지불했다. 매 수업 때마다  느끼는 만족감을 최대리와 나누고 싶어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최대리에게 카톡을 보냈다.

ㅡ 돈을 벌 때는 한 번을 못 느낀 만족감을 돈을 쓸 때는 느끼네.  

돈을 벌면서 행복감마저 느끼는 사람들은 그 얼마나 선택받은 자들인 걸까. 나보다 9살이나 어린 후배도 맥주 마시다 말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대리님. 일이 재밌어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래, 그 어려운걸 감히 바랬다, 내가.

돈을 벌 때 느끼는 불행을 행복으로 부지런히 치환하는 나를 토닥토닥해주는 의미로 오늘은 수업 끝나고 집에 가서 맥주 한 캔 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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