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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Nov 02. 2020

캐나다 재즈바에서 CD를 사면 생기는 일



10월 31일, 핼러윈이라는 것을 몰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날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운전을 하며 서울에 가는 동안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잔여 데이터가 간당간당해 오늘이 31일이란 것이 난감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데이터 리필 쿠폰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달의 마지막 날에 리필을 하는 것은 하루 동안 3.5기가를 다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건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아, 어쩌지 하다가 오랜 시간 방치했던 CD 한 장을 챙겼다.  
CD는 캐나다의 한 재즈바에서 그날 처음 본 밴드의 연주를 듣고 즉흥적으로 산 것이었다. 음악은 참 신기한 것이 그저 듣는 것만으로, 10년 더 된 일이 벌어진 장소로 나를 데려간다.








 한 겨울의 토론토, 나는 유학 중인 중학교 동창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대학시절, 유행처럼 번졌던 한 달 코스 유럽 배낭여행 이후 내 생애 두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았던 때라 그 어떤 경유를 감수하고 제일 싼 비행기 티켓을 샀던 기억이 난다. 해외여행은 두 번째고 캐나다는 처음이었던지라 나는 뽑는 여행에 혈안이 되어있었고, 상당히 들떠있었다. 외로운 유학생활에 내가 찾아가 친구와 나의 만남은 그야말로 반가움으로 가득 찼고, CD를 샀던 재즈바에 가기 전까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보컬의 음색은 캐나다의 살인적인 추위를 감싸 안을 정도로 따사로웠는데, 특히 나는 콘트라베이스의 연주에 매료되었다.  그 악기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건만 그의 연주가 내게는 제일 멋져 보였다. 아마도 그때 그가 가장 열정적으로 보였고 가장 몰입되어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모든 연주가 끝나고 그 밴드의 CD를 사서 그의 사인을 받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잊지 못할 토론토의 밤이라며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나 대신 그에게  인과 사진 찍기를 요청했던 친구는 달랐던 모양이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워딩은 기억 못 하지만, 그날 친구는 그 연주자의 사인을 받고 사진까지 찍는 내 행동을 관광객스럽다 무시하며 창피해했다. 그 말과 행동이 못내 서운했던 나는 끝내 친구와 다투었다. 사실 나는 그때 관광객스러운 것이 아니라 진짜 관광객이었기에 촌스럽다 치부되는 것이 억울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그 친구가 왜 그랬을까 나 나름대로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내 행동이 진짜 창피해서 싫었을 수도 있지만 혹시 이거였을까 추측되는 것이 하나 있긴 했다.

내가 친구 집에 머무는 일주일 내내 친구는 평소 집에서 한식(특히 김치)을 절대 먹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마 나도 그 집에 머무는 동안 한식을 먹을 일 없을 거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던 것 같다. 심지어 친구의 홈스테이 집주인은 한국인 할머니셨다. 그런데 친구는 냄새를 운운하며 한식을 절대 먹지 않는다고 했다. 일주일 머물다 떠날 여행자인 나와 달리 타지에서 몇 년을 공부했던 친구가 이방인으로서 가졌던 어떤 자격지심, 어떤 트라우마가 있었을 거라고 나중에서야 예상을 해보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중에 혼자 벌인 추측일 뿐이고 진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당시의 나는 친구의 그런 반응이 몹시 서운했고 화가 났다는 것이 내가 기억하는 사실 전부다. 그리고 나는 그 와중에 사인을 해달라는 그 한마디를 영어로 하지 못해 친구에게 부탁하는 내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친구가 인을 autograph라고 표현했을 때, 나는 그 단어를 그때 처음 알았다. 만약 그때 내가 나 혼자 나대다 sign이라 말했다면 나는 대화도 안 되고 사인도 못 받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아직도 가끔 한다. (실제로 그 뒤로 외국인에게 사인받아 본일이 없어서 나의 부족한 영어가 통했을지 안 통했을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autograph라는 그 단어를 영영 못 잊게 되었다.







 둘 다 어렸던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화해를 했고 남은 일정 동안은 다시 평소처럼 놀 수 있었다. 일주일은 훌쩍 갔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친구가 비행기 타기 전에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전화를 하라고 했다. 가는 마당에 그럴 일이 뭐가 있을까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결국 나는 그때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마침 토론토 공항의 내부공사가 있었는데 비행기를 탑승해야 할 탑승구를 못 찾아 멘붕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수업 중일지 모를 친구를 방해하기 싫었고, 더 이상 영어로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던 터라 나는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안내데스크를 뛰어다니며 어떻게 해서든 내가 탈 항공사의 터미널을 찾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모두들 나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대답을 했고, 나는 이렇게 공항에서 미아가 되는 것인가 하는 공포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친구에게 전화를 하지 않으려고 온갖 발버둥을 치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결국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가 무슨 일이냐며 한 번에 전화를 받았다. 너무 다급했던 나는 재빠르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공항이 공사 중이라 터미널과 탑승구가 바뀐 것 같은데 안내데스크에 아무리 물어봐도 자꾸 나한테 호텔 예약방법 같은 거나 알려주고 너무 이상하다고 말했다.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 타는 항공사가 뭐지?
나? 캐세이 퍼시픽! 왜?!

너 혹시 뭐라고 발음했어?
캐. 세. 이 퍼시픽. 왜? 뭐가 달라?

캐 thㅔ이 라고 했어? 캐세이라고 해서 못 알아 들었을 수도 있어.

 너무 허무하고 믿을 수 없는 대답이었지만 일단 비행기를 타고 봐야 해서 친구에게 고맙다 하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다시 찾은 안내데스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th발음을 내뱉었다. 그러자 정말 놀랍게도 제대로 된 응답이 들려왔다.  누가 들으면 뻥인 줄 알 것 같은 이 상황에, 나는 뭔가 홀린 기분마저 들었다.

아, 그런 거였어. 학창 시절 그토록 강조받았던 th의 발음을 무시한 대가가 이토록 큰 것이었어. 끝까지 영어에 놀림당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여하튼 나는 캐thㅔ이 퍼시픽 비행기를 타고 무사히 한국에 돌아왔다. 캐나다 여행에서 영어와 벌어졌던 몇 가지 사건들(그러고 보니 굉장히 유명한 레코드 가게에서 섹스 앤 더 시티 디비디를 살 때도 서투른 영어 때문에 점원에게 무시당했다)은 훗날 내가 회사에 입사한 이후 영어 공부를 끝끝내 놓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물론 영어 공부를 한 이후에도 문법과 본토발음을 파괴하는 영어를 꽤 자주 구사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 영어를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꿀려하진 않는다. 그냥 매일 조금씩 해서 그런가 누가 뭐라 하거나 말거나 스스로 당당해져 버렸다.





 다시 듣는 밴드의 노래들은 한 번 들어기억이 분명했만, 역시나 완벽한 리스닝 불가능했다.

부족한 데이터 덕에  참으로 핼러윈스럽게 운전 내내  영어 노래를 들으며 서울에 갔다.

 데이터가 빵빵했다면, 나는 아마 (언제나 그랬듯) 10월 31일을 기념하며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무한 반복서 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데이터가 갱신된 11월, 아쉬운 마음에 뒷북치며 이 노래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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