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디 Mar 26. 2021

나이 먹은 것 말고 한 게 없네


 며칠 전 고객의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확인하다가 깜짝 놀란적이 있다. 뭐가 잘못됐나 재확인했던 것이 앞자리가 01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보다 나이 어린 고객의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마침내 01년생에 태어난 고객까지 마주하게 된 것이다. 내 학번이 01학번이니 예스러운 표현을 빌리자면 첫사랑에 실패만 안 했어도 저만한 아이(?)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 옆자리에 앉는 동일 학번 선배 대리에게 01로 시작하는 주민번호를 봤다고 했더니 그도 잠시 뭐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몇 초간의 정적을 깨고 선배가 내뱉은 말은 아, 우리 언제 이렇게 나이 먹었냐는 한탄이었다. 나도 깊이 공감을 하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서 말이 통하는 몇 안 되는 선배인 데다가 정확히 같은 시기에 학창 시절을 보냈기에 우리는 수다를 잘 떠는 편이다. 얼마 전에는 우연히 삐삐 얘기가 나왔는데, 그 시절 공중전화를 찾아 가슴 졸이며 음성 녹음을 확인했다는 선배의 말에 킥킥 거리며 아 옛날 사람하고 놀리기도 했다. 우리 대화는 꽤 자주 유치하게 흘러가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정녕 우리 나이가 사십 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후배들 앞에서나 고객들 앞에서는 어른 입네 그럴듯하게 연기하지만 내 정신 연령은 아직 나만 아는 특정 시기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약 한 달 전부터 오른쪽 손목의 통증이 심해서 한의원에 다니고 있는데,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내 말에 선배 역시 오른쪽 팔과 어깨가 말썽이라고 했다. 서로의 질환(?)에 대해 공유하는 대화가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웠는데 그때도 입에 착 붙는 대화 주제 뭐지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어제는 선배가 왜 아저씨들이 아이돌을 좋아하는지 알겠다는 말을 했다. 우리 둘 다 정작 십 대에는 아이돌을 좋아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야 그 매력을 알겠다며 각자최애 아이돌 배틀을 뜨기도 했다. 주중 한가운데가 지난 목요일이 되면  감당할 수 없는 피로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맴도는데  최애 아이돌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시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았다. 심지어 선배는 아이유가 tv에 나오면 너무 반가워서 자기 혼자 손 흔들며 인사한다는 소리까지 했는데, 그러다가 그녀가 나왔던 드라마 얘기로 번지고 나는 오늘 그 여운이 남아 아침 출근길에 그 드라마 ost를 들었다. 노래 제목이 '어른'인 만큼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정확히  가슴 한가운데에 꽂히었다.



고단한 하루 끝에 떨구는 눈물
난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이 넓은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아무도 내 맘을 보려 하지 않고 아무도


 사무실에 도착해서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홍삼 스틱을 찢는 일이다. 내 피로감에 대한 최소한의 처방이다.


어쨌거나 오늘은, Thank God It's Friday다.

매거진의 이전글 11년 차 대리를 조심하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