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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Apr 19. 2021

김대리의 정신과 상담



직장인 괴롭힘 관련 고충 접수 전후로 나의 불면증은 점점 심해져갔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말이 통하지 않은 사람들과 어떤 정식적인 절차를 벌린다는 것, 또 그것을 문서화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지만, 똑같이 행동할 수 없는 내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옵션이었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잠까지 못 자는 날이 지속되자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고, 육체적인 피로가 말도 못 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내 생애 두 번째로 정신과 상담을 받기로 했다. 몇 년 전에 첫 번째 진료를 받았던 병원을 금세 검색했다. 의사 선생님 덕분에 기억이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전혀 다른 문제로 병원을 가기가 왠지 부담스러웠다. 그 병원엔 나의 또 다른 아픔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내 인생에서 벌어지는 문제들과 그때마다 휘청이는 모습을 한 곳에 까발리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다. 마침 그 병원 근처에 다른 정신과 의원이 있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의사에 대한 짧은 소개를 읽어보니 직장인에 대한 책을 쓴 경험이 있는 의사였다. 그 하나로 왠지 지금의 내 마음을 잘 헤아려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바로 전화를 해서 진료예약을 하고 연차를 쓰고 병원에 갔다. 의사가 왜 오셨냐고 물어봤다. 그리 슬픈 질문도 아닌데 첫 질문부터 눈물이 났다. 의사는 내 얼굴보다는 주로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질문을 했다. 내 말을 듣기는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의 힘든 마음을 의학적으로 풀어주겠지 기대하면서 눈물 콧물과 함께 주저리주저리 대답을 했다. 의사가 대뜸 증거가 필요하신 가요?라고 물어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 순간 멍해졌다. 아마도 이번 직장인 괴롭힘과 관련하여 나의 정신적 고통이 얼만큼인지 보여줄 수 있는 증거를 말하는 것 같았다. 너무도 현실적인 얘기였지만, 정신과 진료에서 기대한 질문이 아니라 그 드라이하고 차가움에 숨이 막혔다.






 내가 회사에 고충 접수를 하고 나서 제일 많이 들은 단어가 '증거'였다. 증거 있니, 증거가 부족해서 등등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었다. 회사가 존속하는 한, 껄끄러운걸 쉽게 인정해줄 수 없으니 누가 봐도 부인할 수 없는 빼박 증거가 이런 사안에서 필수였다. 특히 회사는 이런 식의 선례를 남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어리석고 순진한 내가 비상식적인 행동이 언제 어떻게 벌어질지 예측하지 못해서 그때그때 녹음과 녹화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큰 죄였다. 나는 감정적인 아픔을 호소했는데, 의사는 증거를 수집하는 절차를 처방해주니 신기했다. 11년 이 회사를 다닌 나보다 의사가 우리 회사를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책을 찾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역시 책을 쓸만한 의사였다.






 의사는 무슨 서류를(이름도 잊었다) 내줄 테니 그걸 들고 대학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라고 했다. 일단 잠을 잘 못 자니 수면유도제도 함께 처방해주겠다고 했다.
너무 짧고 간단하게 진료가 끝이 났다.

 이번에 진료를 받으면서 마음의 병은 신체의 병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한답시고 벌인 행동이 마음의 병을 더 깊게 하거나, 또 다른 마음의 병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대학병원은 또 어떨까. 기대가 아닌 걱정이 엄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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