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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Apr 28. 2021

내가 돈을 벌던 첫날



 병실에서 맞는 두 번째 아침이다. 환경이 바뀐 탓인지 첫째 날 밤에는 통 잠을 못 이뤘다.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잠에서 깨는 바람에 잠을 잔 건지 아닌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리고 어제는 한쪽 코에서 줄기차게 콧물이 흘러 휴지로 막고 있어야 했다. 덕분에 의사, 간호사, 청소해주시는 아주머니에게서 온종일 코피 났냐는 질문을 받았다. 첫째 날 밤 잠을 못 잔 탓 어제는 한두 번 깬 것을 빼면 비교적 길게 잠을 잤다. 다만, 어제 꿈속에서 나는 시험이 당장 내일인데 시험 범위조차 모르는 학생으로 등장했다. 너무 당황한 내가 친한 친구들에게 시험 범위를 물으려고 전화를 했는데, 웬일인지 친구들은 알았다고만 하고 줄곧 딴청을 피웠다. 나는 꿈속에서 친구들을 원망하고, 시험 범위를 몰라서 안절부절못하다가 아침 식사 왔습니다라는 말에 잠에서 깼다.







 병원은 생각보다 아침을 일찍 주었다. 사실, 나는 평소에 아침을 먹지 않기 때문에 이른 시간에 뭔가를 먹는다는 것이 익숙지 않지만 환자는 병원의 룰을 충실히 따라야 회복될 수 있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에 밥을 주면 밥을 먹고, 약을 주면 약을 먹는다. 그 덕에 불과 3일 만에 밥 먹고 약 먹고 잠자는 시간 등의 완벽한 루틴에 평온함을 느끼게 되었다. 직장생활도 출, 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고 매일 반복된 업무를 하는 걸로 따지고 들면 역대급 루틴이었는데 어쩜 그곳에서는 그리도 내 마음의 루틴이 산산조각이 났었는지 모르겠다.

 아침을 먹고, 세수와 양치를 한 다음 잠시 침대에 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어쩌다 보니 혼자 쓰긴 하지만) 5인실이어서 그런지 지금껏 의사든 간호사든 그 누구 하나 병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잠깐 어, 누구지 하는 신선함이 스치었다. 조심스러운 노크가 어디서 왔는지 알 것만 같은 간호사 세 명이 들어왔다. 아침마다 체온과 혈압을 재는 간호사 분은 한 명인데 세 명씩이나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단박에 배우는 과정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기계 하나가 누락됐다며 다시 가져오겠다 하더니 나갔다. 두 번째 들어와서 호기롭게 혈압을 쟀는데, 이번에는 체온계가 문제였다.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체온계 버튼을 누르고 체온계를 때려도 보더니 죄송하다면서  나갔다. 그때 슬쩍 명찰을 봤는데 ○○대학교  간호학과 학생이라는 글자들이 보였다. 싱그러운 귀여움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초보자의 징크스인지 뭔지 초보자일 땐 뭘 좀 해보려고 하면 선배들에게는 발생한 적 없을 것 같은 크고 작은 말썽이 나한테만 생긴다. 내가 신입사원일 때는 혼자서 고객에게 서류 한 장 받기를 덜덜 떨면서 받았었다. 어설픔과 조심스러움은 실수와 실수를 낳고, 나에게 걸린 고객들은 서류를 다시 작성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떠안아야 했다. 그런 내 모습을 싫은 티 내며 못마땅하게 본 분들도 있었지만, 신입일 땐 다 그런 거라며 천천히 다시 써주신 고마운 분도 있었다. 나는 그때 내가 신입사원이라고 써붙인 것도 아닌데 어쩜 이렇게 다들 잘 알아채시지 하며 놀라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건 그냥 티가 나는 것이었다. 배우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만이 뿜어내는 기운이라는 것이 있다. 그 기운 안에는 책 혹은 선배에게서 '배운 대로' 실수 없이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 열정도 있고 실전을 마주하는데서 오는 쭈뼛거림, 조심성도 있다. 그리고 이 학생들의 경우 그 기운은 이미 내 병실을 '노크'하는 순간부터 발산된 것이었다. 결국 나는 오늘 혈압과 체온을 두 번씩 재고 나서야 그 활기찬 예비 간호사님들과 헤어질 수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고 나와 전혀 없는 상관없는 분야지만, 어딘가에 첫발을 내딛는 간호과 학생들을 보니 내가 초보자였던 그때가 떠올랐다. 세상은 '배운 대로'만 흘러가진 않을 텐데, 책에 쓰여있지 않은 수많은 것들이 수없이 펼쳐질 텐데 하는 생각에 안쓰러움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경험과 시간들이 책 사이사이의 행간을 채울 때쯤에 그들에게는 노련미와 여유라는 것이 생길 테니 뭐가 됐든 이 세상 공짜는 없는 것이다.

 간호사 루키들 덕에 언니 미소를 지으며 이런저런 생각들로 글을 끄적이고 있는데 담당 전공의 선생님이 들어왔다. 첫날 면담 때부터 느꼈는데 이분의 아우라도 주치의 선생님과는 다르다. 하필 전공의 선생님이 나의 상태를 체크하는 중에 주치의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과정을 거치고 있는 자와 과정을 거친 자, 결정 권한이 있는 자와 결정 권한이 없는 자는 이렇게 다르구나를 또 한 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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