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가의 잔여일수가 한 자릿수로 떨어질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름대로 고군분투의 시간을 보내느라 회사 생각을 하지 않아서 참 좋았는데, 복귀할 때가 다가오니 회사에 대한 잡념들이 사방팔방 떠다닌다.
게다가 마음의 화상이란 건얼마나 잘 아문 건지 눈에 보이질 않고,적응 장애라는 증상이 회사를 다니면서괜찮아 질지장담할 수도 없다.
그래서요즘 '병가 끝, 회사 출근 시작'했을 때 내일상이 잘 굴러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들기 시작했다.
어떤 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 사람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단계라는 것이 있다.담당 의사 선생님에게내게 벌어진 일들과 내감정 상태를 털어놓았을 때 많이 들었던 말이 '그럴 것 같아요, 그럴 수 있어요'였다.
그리고 각각의 과정에서 사람에 따라 빨리 빠져나오는 단계가 있고, 생각보다 오래 머무는 단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전히 진행 중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자책'의 단계에서 유독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이 자책의 단계에서 나를 덮친 건,'내가~했다면, ~하지 않았다면 '식의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가정과 어리석은 선택에 대한 회한이었다.
주로 명제는'이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다면...'이었고,입사와 관련한 지난날의 선택을 후회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과거의 나에게도 그때 나름의 사정과 이유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다리만 걸치고 최선을 다하지 않던 공부를 때려치우고, 취업을 하기로 하고 나서나는 빨리 취업에 성공한 편이었다. 친구들에 비해서는 한참 늦은 취업이었지만, 소위 취업을 위한 스펙과 관련해 이렇다 할 한 줄이 없었기 때문에 단계별 합격통보를 받았을 때 어안이 벙벙했었다. 물론 촉박한 시간에 상황은 절실했던지라, 회사 공고에 따라 열심히 준비하기는 했다. 다만 이런 시험을 보고 이렇게 되는 게 취업인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물론 최근 입사하는 신입사원들의 시험 과목이라면 지원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험과 실제 일은 전혀 상관이 없다 해도)
어쨌든 본격적으로 취업을 준비하기로 하고 한 번의 탈락 경험을 한 뒤 반년만에 밥벌이를 할 수 있었기에 비교적 무난하고 빠르게 취업의 관문을 통과한 셈이었다. 어디 내놔도자랑스러운회사는 아니었지만, 안정을 쫓는 축에서는 선호하는 공공 기관이었기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하는 안도감으로그렇게 직장생활을 시작했다.그리고 10년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 그건 내게 어쩌다 주어진초보자의 행운이었고, 내 인생 최대의 독이었음을깨닫게 되었다.
여자치고 나이가 많은데 뽑힌 것과 지난한 과정을 또 겪을 필요 없다는 것에 감지덕지한 마음은진짜였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고 얼마 되지 않아 회사 업무와 회사 사람들을 보고 건방진 마음을 품었다. 그때의 나는 비단 회사뿐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도 내가 마음만 고쳐먹으면 내 방식이 먹히는 건 시간문제야 후후 하는 자만심으로 꽉 차 있었던 것 같다.
그에 대한 벌로 한참을 빙빙 돌고 나서야 내 방식의 한 조각, 한 톨이받아들여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았다.
받아들여지기는 커녕, 내 것을 밖에 내놓을 기회 조차 갖기 힘들다는 걸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
하향 취업이라며 우습게 봤던 회사에서는 그 룰에 적응하지 못해 완벽한 비주류가 되었고, 회사를 기형적인 온실이라 욕하면서도완벽히 젖어버려서 치열한 바깥세상에발 한 짝 못 내미는 무능력자가 내 현실 좌표였다. 최선은 자신 없고, 최악은 피하고 싶은 도둑놈 심보에 차선과 차악만 요리조리 저울질한 그 끝.
담당 의사 선생님과 임상 심리사님 두 분이 나에 대해 공통적으로 환기시켜주는 대목에서도,나란 인간이참 전반적인 뒷북이라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업무, 회사와 회사 사람에 대한 분노로 병까지 난사람 치고내가 한회사를 꽤 길게 다녔다는 것이었다.묻는 말에 대답하면서도, 마치 남 얘기인양 그러게요 저 왜 그렇게 긴긴 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을까요 되묻고 싶었다.
그래서 병가 기간 중간중간 틈날 때마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한테묻곤 했다.
그결과변화가 귀찮아서 덮어버린 적도 있었고, 회사 다닌 시간에 대한 본전 심리도 있었고, 나 그렇게 쉽게 나가떨어지는 사람 아니야란 target 틀린 근성도 있었고, 무엇보다 내 선택의 오류와 그에 따른 실패, 내가 만든 이력의 오점들을 인정하기 싫었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언젠가 (회사생활에 대해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유일한 동료) 최대리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가 '만약 회사에서 겪었던 일을 겪지 않았다면', 그냥 남들처럼 비슷하게 회사 잘다녔을 거란 얘기였다. 그땐 맞아했는데, 병가가 끝나가는 지금 내의견이 좀 바뀌었다.
일이 벌어지고 그걸 겪어서 이렇게 된 게 아니고,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고 어떤 형태로든 이런 계기를 맞는 순간이 왔을 거란 생각으로 말이다.
밖은숨 막히게 더운 요즘인데,내 안에서는 스스로를 갉아먹었던해로운 열기가 많이 식은 기분이다.이렇다 저렇다 내뱉고 싶은말들은 저 멀리 내다 던지고, 그저 묵묵히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100일의 시간 동안 곰이 사람이 될 순 있어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는 데는 택도 없는 시간이라 생각했었다.
100일에 못 미치는 시간이었지만, 병가를 끝내며 돌아보니 이 시간들이 아주 헛된 시간만은 아니었던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