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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n 09. 2022

김대리의 연차


순전히 쉬기 위해서 냈던 휴가가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


사전투표를 한 덕에 6월 첫날부터 완벽한 휴가가 시작되었지만, 몇 달간  쉴 새 없이 달리다 긴장 풀린 몸뚱이는 나로 하여금 집안 소파에서 떠날 수 없게 하였다. 하루 종일 인정사정없이 먹고 자고 뒹굴거리는 것으로 자가처방을 내렸더니 다음날의 선약에 설렐 정도의 힘이 생겼다.


 연차 첫날, 나는 두 명의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인데 그러다 보니 시간 맞추기가 늘 힘이 들었다. 평일 휴가를 써서 이른 점심에 만나 저녁 전에 헤어지거나, 주말에 만나도 일찍 헤어져야 했다. 그래서 휴가를 내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평일 중 하루는 친구를 만나는 것을 구상했다. 저번 만남 때 내가 서울로 가서 만났던 친구가 이번에는 인천으로 오기로 했다. 내가 익숙한 곳에서 친구와 같이 산책을 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친구는 일찍 취직해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다가 육아에 몰두하기로 하고 몇 년 전 일을 그만두었다. 친구는 아이를 등교시키고 동네 엄마들과 자주 이런 스케줄을 가져 별 느낌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평소와 너무 다른 평일 오전과 점심에 대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러다 갑자기 그래, 원래 나는 딱히 남에게 관심도 없고 화도 없는 사람이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가 왜 회사만 갔다 하면 거슬리는 인간들 투성에 그들의 언동으로 분노가 치솟는 걸까. 내 안에 있는 온갖 가시들을 박박 긁어 바짝 세우고, 그래 어디 나 한번 건드려볼래 나도 내 다음과 바닥이 궁금하다 인마를 속으로 중얼거리게 될까.

 

아니 왜. 회사만 가면?


 남편과 아이 얘기하는 친구에게  질 수 없어 내가 매일 보는 회사 사람 얘기를 하다 보니 결국 또 꼴 보기 싫은 김대리로 돌변해있었다. 그래도 친구는 직장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나를 너무, 잘 이해해주었다.






 하교하는 아이를 케어해야 하는 친구와 짧은 만남을 끝내고 이번에는 다른 친구를 만나러 서울로 갔다. 친구 회사 앞으로 가기 전, 예약해 둔 호텔로 가서 체크인을 했다. 서울을 갈 때마다 차를 끌고 가거나, 대중교통이 불편해 편하게 술을 먹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이번에는 작정을 해보았다. 조계사 바로 맞은편 호텔로 조계사 view를 가진 룸이었다. 불자가 아님에도 절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신기하고도 편안한 view였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인사동 골목을 거니니 진짜 서울을 관광하러 온 여행객의 기분이 들었다. 전철을 타고 친구 회사 앞으로 가는 길에는 전철 안의 사람들이 보였다.  출퇴근길에 타는 전철에서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로 꽉꽉 들어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도 없지만, 내 마음도 누군가에게 시선을 줄 여유가 없다. 1초라도 빨리 지옥철을 탈출하고픈 마음에 지금이 어느 역이지? 아직도 이 역이야? 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낯선 광경을 즐기다 보니 지루할 새 없이 친구 회사 앞에 도착했다. 몇 분 일찍 도착해 역 주변을 어슬렁거렸는데 아파트 분양의 이슈 때문이었는지 생전 안 하던 검색을 했다. 눈앞에 있는 아파트 시세 검색이었는데, 육안으로도 오래돼 보이는 아파트들이 다 10억이 넘었다. 서울 그리고 역세권이란 이런 건가 싶다가도 (내 수중에 있을 리 만무한) 10억이란 숫자에 딱히 놀라지 않는 나의 배포도 놀라웠다. 검색만 했을 뿐인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옆으로 지나갈 때마다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손으로 가렸다. 이상하게도 혼자 몰래 코딱지 파다가 걸린 기분이 들었다.


 디어 칼퇴를 한 친구가 안내한 예스러운 공간에서 술을 마셨다. 한 동안 주춤했던 주량이 서서히 회복해서인지 술이 잘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엄청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말을 해도 해도 너무 했다. 친구라고 썼지만 나이 차이 나는 후배였는데... 뭔가 주저리주저리 말 많은 꼰대였을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어릴 땐 막연히 좋아서 적어둔 시인데 나이 들수록 구구절절 가슴을 때리는 김종길 시인의 <귀로>가 떠올랐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규범을 넘지 않는다는 나이인데도, 집으로 돌아갈 때면 흔히 고개 드는 두려움.

오늘은 오후에 인사동 근방에서, 사람들을 만나 볼일을 보고 즐겁게 담소(談笑)도 나누었건만.

늙은 주제에 주책이나 떨지 않았는지,
허튼수작이나 늘어놓지 않았는지,
남의 험담이나 하지 않았는지.


 



아무래도 후배를 앞에 두고 주책과 험담이 너무도 난무했다.


마흔의 나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했다가는, 부지불식간에 법도를 넘어서는 것을 새삼 또 깨달았다. 오랜만에 낸 내 연차의 첫날은 이렇게 또 깨달음 하나 적립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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