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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Nov 18. 2022

오랜만에 도망을 쳤다


 코로나 사태 이후 오랜만에 다시 공항을 찾았다. 2020년 1월, 나는 치앙마이에 있었다. 그것이 코로나 이전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이 있는데 여행이 끝나갈 무렵, 한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지금 난리가 났다며 한국에 들어올 때 반드시 마스크를 사서 끼고  오라고 했다. 친구 문자에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고 바로 마스크를 사러 나갔다.  놀랍게도 들어가는 가게마다 마스크는 품절이었다. 겨우겨우  마스크 세장을 구해 같이 여행 간 사촌동생과 나눠 끼고서 치앙마이 공항부터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곧 지나갈 전염병 중 하나겠거니  그렇게 쉽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근 3년이란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여전히 마스크를 끼고 공항에 있다. 코로나로 하늘길이 닫히고 해외여행이 제한되고 나서 해외여행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직장인으로서, 아직 시집가지 못한 여자로서 일상과 세상으로부터  할퀴어진 흉터가 감당 불가 수준이 될 때면 여지없이 캐리어를 쌌었다.

시간과 돈,  에너지를 절약하고자 국내여행을 시도해보기도 했었다. 더 찾아보지 않은 게으름이었을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내게 좋아 보이는 곳은 남들에게도 좋아 보이는 법, 가는 곳마다 전형적인 장면이 너무 잘 보였고 정형적인 말들이 너무 잘 들렸다. 도망친 곳에서조차 비교의 일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다른 차원의 스트레스를 가져다주었다. 처음에는 그저 좋아서 나갔던 해외가 나이 들면서 이런 의미로의 피난처가 된 것이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내게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깜빡이 켠 채 친절하게  끼어드는 일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그것들에 응수하느라 제정신일 수 없는 시간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일들은 내가 원치 않은 일들이었고, 어쩌다 원한 것도 내 능력을 시험하는 양  좋지 않은 시기에 겹쳐 벌어졌다. 그래도 매일의 해는 뜨고 지니까  주어진 걸 해가면서 꾸역꾸역 살긴 살았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 아니 여러 구석에서 내 삶의 고삐를 내가 쥐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이게 지금 맞는 건가 하는 질문들이 삐져나왔다. 때마침 해외여행 제한이 완화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렸고, 주변에서도 조심스럽게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시기상으로 이때다 싶어 결심한 날, 비행기표에서 호텔까지  한 큐에 예약을 했다.

 

 그리고 몇 주전 오랜만에 소설책 한 권을 읽었다. 저번 달 좋아하는 작가 강연회를 갔다가 작가님의 입에서 나온 책이라 적어놨다가 읽게 되었다.

 제임스 M. 케인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라는 작품이다. 정작 소설에 포스트맨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원래 이런 의미심장한 제목에 마음이 끌리는 나는 소설의 제목부터 좋았다.

 책도 얇아 펴자마자 단숨에 읽었고, 작가님의 말씀대로 사실 별 얘기가 아닌데 책을 덮은 이후에도  계속 여운이 남았다. 공항에서 짐을 부치기 위해 기다릴 때도, 꾸벅꾸벅 졸다 깬 비행기 안에서도, 여행지에 도착한 지금까지도 소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어떤 작품에 대해 쉽게 헤어나지 못했던 경우 대게 그 안에 평소에 나를 장악하고 있던 무언가가 있다.


 소설 속 주인공 방랑자 프랭크는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소설 속 주인공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진전이 안되니 너무도 당연한 거지만 그가 벌이는 모든 일들이 상상치 못한 방향으로 아귀가 맞아 들어가 끝내 그를 파멸로 이끌었을 때 내가 왜 이 소설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최근 몇 년간 내게 벌어진 일들을 겪으면서, 실제로 나는 이럴 바엔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나을뻔했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내 딴에는 잘해보려고 발버둥 친 모든 것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생각지도 못한 벽을 마주했으며 결정적으로 무언가 얻으려고 한 것이 무언가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는 소설 속 프랭크처럼 범죄를 계획하고 저지른 적도 없는데 말이다.


 '내 딴에는' , 

 바로 이 부분이 잘못된 지점이었을까?

 이게 답일 겁니다 하고 적어낸 답안지에 세상이 자꾸 틀렸다 하니까 답답하고 화가 났다. 거기다 내가 다니는 회사처럼 작위와 부작위의 결과 차이가 크게 없는 집단 분위기까지 더해지면 회의감과 의구심은 더 깊어진다.


 생각해서 자꾸 뭔가 벌리는 것과 별생각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처음에는 내 판단력과 지혜의 부족 문제에서 시작했다가 조금씩 더 깊이 확장해본다. 애초에 내가 판을 잘못 선택하여 '내 딴에는'이 먹힐 여지가 전혀 없는 곳이었다면, 그로 인해 내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항목과 비중이 엉망진창이 되었다면? 이 또한 나 자신과 내가 놀아야 할 판에 대한 무지와 오판의 결과니까 역시 내 문제로 귀결된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 그렇게도 똑똑하게 자기 판을 잘도 찾아 들어갔을까?


 적어도 이번 여행에서는 여행이란 응당 이런 것이지 하는 건 집어치우고 내가 하고 싶은 건 원 없이하고, 하기 싫은 건 아예 안 하려고 한다.

이건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니 그 기준이 퇴색될 일도 방해받을 일도 없다. 이렇게 거창하게 도망쳤어야만 알아질 일이었나 싶지만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방향만 잡고 가도 이번 여행은 성공이다.






  의구심과 회의감이라는 불청객 덕에 중간중간 속도를 늦췄을지언정, 내가 세상에 던져진 이유가 가만히 있으려고 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란 인간은 어쩜 이리도 뒷북 소리가 요란한가 싶지만... 어떻게 무슨 일을 벌여야 나 자신과 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꼭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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