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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Nov 21. 2022

오전 10시 임금피크자의 뒷모습


 회사를 13년째 다니는 동안 나보다 먼저 입사한 직원이 자진퇴사를 하는 걸 난 딱 한 번 보았다.

직원이 이직을  한다거나 퇴사를 하는 건 그만큼 드문 일이었는데, 그나마 있었던 것도 최근 몇 년간 벌어진 일로 10명 중 9명은 입사 3년 이하의 직원들뿐이었다.


 이렇다 보니 직원이 승진을 하기 위한 자리 마련의 확실한 카드는 임금피크제가 되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경우, 정년을 기준으로 3년 전부터 모든 직을 상실하고 임금이 깎이는 임금피크제에 들어간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생각보다 임금은 많이 깎이지 않는다고 하니, 자기의 자리(?)를 내어놓음으로써 인사적체 해소에 기여하는 것. 그것이 임금피크제의 가장 큰 의의라 할 수 있겠다.


 나 역시 한 상사가 임금피크에 들어가면서 나온 자리 덕에 뒤늦은 승진을 했다. 인생이 이럴 때 재밌다고 해야 하는 건지, 얄궂다고 해야 하는 건지 그 상사는 내가 신입 때 처음 같이 일한 지점장이었는데 임금피크 원년에 지금 또 나와 같은 지점에 있다. 그는 내가 글로도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을 정도로 회사에서 싫은 인간 탑 쓰리 안에 꼭 드는 자다.


 그런데 그가 매일 얼굴도장만 찍고 오전 10시쯤이 되면 슬그머니 사라진다. 나는 이 지점에서 임금피크에 들어간 직원과 처음 일해보는 것이라 그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그의 급여는 깎인 것이지 아예 안 받는 것이 아닌 데다가, 깎였다 한들 일선에서 한창 일하는 직원들보다 여전히 차고 넘친다.

 

 그에게 직이 있었던 동안에도 본인 월급을 받는다는 이유로 일했을 뿐, 회사와 조직 발전을 위해 대단한 기여와 공로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매일을 한결같이  출근 1시간 만에 퇴근해도 되는 이 과한 대접과 터무니없는 배려는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물론 그 1시간 동안에도 그가 하는 일은 없다.

퇴근 체크 화면에 얼굴만 찍고 바로 가면 민망하니까, 뻘쭘함 탈피용으로 그나마 한 시간 동안 앉아 있다 가는 것이다. 다른 지점에서 임금피크에 들어간 상사도 이와 비슷하다 들었다.

 책임도 없고 일도 하지 않는데 사무실에 잠깐 얼굴도장 찍는 수고로움으로 돈은 돈대로 받아간다. 정말이지 너무 기형적이고 비정상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감정과 별개로 그렇게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볼 때면 담을 넘어 몰래 도둑질하는 자와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하고 만다. 내가 바쁘지 않아도 시선이 고울 리 없는데 아침부터 바쁘기라도 한 날이면 조용히 나가는 그에게 무슨 근거로 그렇게 가시는 거냐고 소리쳐 묻고 싶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런 부대낌과 의문에 대해 다른 상사나 동료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언젠가 본인들도 누릴 거란 기대심리 때문인지, 괜히 먼저 긁어 정 맞고 싶지 않다는 이유인지 대부분의 답변은 '그러게...'였다. 여기서 못 참고 내가 먼저 지르면, 대리 벗어나는데 10년 넘게 걸린 것보다 더 한 꼴을 보는 건 어차피 또 내가 될 것 같아 그만 입을 다문다. 그나마 임금피크제라는 제도가 있어 겨우 자리 하나를 차지했으면, 더더욱 찌그러져 있어야 는데 나도 모르게 옛날 버릇이 또 꿈틀대었다.


 바로 옆에 앉은 상사의 자격지심 뒤범벅된 근자감과 척이라도 "" 할 수 없는 의견 피력을 듣는 것만으로도 부대낌은 이미 한도 초과인데, 여기에 오전 10시 임금피크자의 뒷모습까지 매일 봐야 한다.


 참다 참다 속이 뒤틀리면 회사 메신저로 동료에게 푸념을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보다 나이 어린 입사 동기가 '언니, 이 모든 게 월급값이야.'라고 말해준다.


 노동력과 시간 제공의 대가인 줄만 알았는데, 내 눈과 귀가 썩어 들어가는 것도 월급값이었다니.

월급값 새삼 참 더럽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다 쓰고 나니 승무원이 한국 착륙을 알린다.

 헬 게이트 이미그레이션의 서막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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