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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Dec 06. 2022

안전빵의 역습


 안전빵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위험이 생기거나 사고가 날 가능성이 전혀 없음. 또는 그런 상태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

안전빵이라고 들어온 회사라 해서 위험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특정 나이까지 잘 릴 일이 없다는 것, 매 순간 나를 증명해야 하는 치열함이 필요 없다는 점에서 내가 다니는 회사는 안전빵이다.

 거기에 (기준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무색할 정도) 요리 갔다 조리 갔다 하는 조직 기준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면, 그 안전빵의 기능은 배가 된다.

 

 문을 닫고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쯤은 안전빵이 아닌 곳에 몸을 담고 싶었는데 나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래서일까. 대체 여기는 뭐 하는 회사지 하며 한심스러운 태도로 지원한 이곳이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 어리벙벙하게 느낀 그 고마움 때문이라도 기회를 준 안전빵을 좋아해 보고자 노력한 시절이 있었다. 나는 두말이 필요 없는 보통 사람이고 항산 없이는 항심을 가질 수 없다니까, 꾸준한 항산이 있으면 항심 비슷 무리한 것이라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항산이 있어도 절대 안 생기는 항심이라는 것이 있었다. 오히려 그 일정한 항산은 독이 되어 그나마 간직해 오던 어떤 항심을 파괴하기도 했다.






 복에 겨운 소리일까, 13년으로 접어드는 긴 세월 동안 안전빵을 떼어먹고 살아 보니 어느덧 나란 인간 자체가 안전빵이 되어버린 기분이 든다.

 나 스스로가 상당히 멋 대가리 없고 시시하게 느껴진다. 이렇다 보니 안전빵을 같이 먹고 있는 사람과의 대화도 하기 싫어졌다.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99프로가 남 험담인데, 안전빵 덕에 얻은 시간과 에너지가 쳐 남아돌아 다른 사람 씹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돈 1~2만 원에 연연하다 끝끝내 바닥을 드러내는 건 본인들이면 잠자코 가만히 있는 나에게 넌 작은 것에 연연해 없어 보인다 말하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있었다. 

 어쩌다 공공의 적에 대한 험담에 조금의 응수를 해줄 때면, 나는 걔네랑 달라하면서 신이 나서 더 떠들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입에서 야 너도 똑같아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 걱정이 든다. 누가 봐도 욕이 나오는 공공의 적을 같이 싫어한다는 것이 네가 좋다는 의미는 결코 아닌데 그런 정신상태가 이제는 부러울 지경이다.


 이런 식의 답답함이 목을 조르면 어김없이 육아휴직 중인 최대리에게 연락을 한다.

이제는 우리 둘 다 대리가 아니지만 3년 전 투 대리 프로젝트를 시작했던 그때처럼 내 마음을 알고 그녀 마음을 아는 건 서로 뿐이다.

 지금은 둘 다 내디딘 발걸음 대비 드라마틱한 결과가 없어서 불안한 마음을 부여잡고, 버티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도 그녀의 말처럼 지금과는 다른 자리에서  시절을 웃으며 말할 날이 꼭 오리라 믿는다.

 

 여러 심산들로 괴로운 하루하루지만 오늘도 안전빵에 체하지 않도록 정신 한 자락을 단단히 부여 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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