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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Mar 23. 2023

당신과 나,그리고 시절인연


한 장면 한 장면 음미해서 보던 드라마가 있었다. 그 드라마를 검색하다가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잡지사와 인터뷰한 기사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배웠다.


시절인연...? 뜻을 모르는데도 소리 내서 읽을 때부터 원인 모를 서글픔이 밀려왔다. 검색창에 얼른 시절인연을 쳐봤다.  


나무위키의 설명을 그대로 옮겨 보자면 이렇다.


현대에는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는 뜻으로 통하며 때가 되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또한 인연의 시작과 끝도 모두 자연의 섭리대로 그 시기가 정해져 있다는 뜻도 내포한다.


 혹시나 이 뜻일까 예상은 했지만 역시 이 뜻이었다. 시절인연의 뜻을 알고 나니 나를 스치고 간 크고 작은 인연들, 지금은 연이 다한 몇 명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아쉽기도 하고 가슴 한 구석이 살짝 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어쩔 수 없지란 생각이 차오른다. 돌이켜보니, 관계의 정리를 철없고 미숙했던 나이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나이가 들고서 끝이난 인연들도 꽤 있었다.

 인연의 시작이 일방의 노력으로 이어질 수 없듯, 사소한 말 한마디와 부주의한 태도로 상처를 주는 가해자와 피해자는 일방의 것이 아니었다.

 시절인연의 뜻대로 인연의 끝이 거기까지라는 것을 서로 알고 있는 것인 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연이 끝나는 것에 '나와 너'같이 동조했고 '우리'함께 기여했다.


 여기서의 인연이 비단 남녀사이의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 삼십 대의 시작과 끝을 지배했던 그의 말도 갑자기 떠올랐다. 그가 큰소리를 낸 첫 다툼이었기에 헤어지고 나서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그가 나의 맘을 풀어주기 위해 마무리로 선택한 문장은 이 드넓은 우주에서 우리가 만난 데는 이유가 있다 대략 뭐 이런 내용이었다. 이 삐걱거림이 관계의 결말에 대한 강렬한 복선임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렇게 말해준 그가 참 고마웠었다. 지금이라면 어디서 본 적도 없는 우주 드립으로 개수작이야 할 법한데 그때는 거기에 기대고 싶었었다.

 그러다가 결국 이 드넓은 우주에 나 혼자 남겨졌고, 그는 이 드넓은 우주에서 다른 여자를 참 빨리도 찾아 만났다. 그와 내가 전혀 다른 우주에 살았다는 것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나의 의식의 흐름은 단순할 땐 하염없이 단순하기에 이번에는 멜론 검색창에 시절인연을 쳐 본다. 두 곡이 나온다. 규현의 시절인연, 이찬원의 시절인연.


가사가 나를 또 후벼 판다.



서툰 우리 인연이 견디지를 못하고
시간 속에 점점 멀어져서
아득히 흩어지는 새벽녘의 수평선 너머
그 시절이 또 지나간다
<규현, 시절인연>


가는 인연 잡지를 말고 오는 인연 막지 마세요
때가 되면 찾아올 거야 새로운 시절인연
친구가 멀어진다고 그대여 울지 마세요
영원한 것은 없으니 이별에도 웃어주세요
<이찬원, 시절인연>


 표현은 좀 다른데, 시절인연을 대하는 자세가 모두 성숙하다. 상대를 원망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으로 세월을 허비하던 지난날. 인연의 단절됨이라는 사실에만 매몰되어 슬픔에 허덕였던 지난날.

 이런 지난 날들 부자인 나에게 이 노래가사들이 많은 위로가 되어 요즘 출퇴근 길에 무한반복으로 듣고 있다.




 오늘은 퇴근길에 개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하필 꽃이 피고 봄이 오는 시절이라 그런 일까. 마흔이 서야 배운 시절인연이란 말이 계속 머릿속을 두둥실 떠다닌다.


 시절인연에 대한 나무위키의 마지막 설명을 읽는다.


시절인연이 맞으면 아무리 거부해도 인연을 만들게 되며, 시절인연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인연을 맺으려 애를 써도 인연을 맺을 수 없게 된다. 한비자가 말한 유연천리래상회(有緣千里來相會) 무연대면불상봉(无緣對面不相逢)도 비슷한 말이다. 연이 있으면 천리를 떨어져 있어도 만나게 되며, 연이 없다면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도 만날 수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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