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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Aug 11. 2023

배신에 대한 단상

영화 밀수를 보고


 한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떠다녔지만 단 하나도 글자로 옮길 수 없었다. 표현하고 싶은 상념이 차고 넘치는데 글을 못 쓰는 경우는 대개 감정 탓인 경우가 많다. (요즘 밈으로 번지고 있는 너 T야? 의 바로 그 T형 인간인데 난 왜 이리도 감정에 휘둘리고 휘청거리는지 모르겠다) 감정 곡선이 최고점에 있어 흥에 겨울 때는 쓰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아 글을 못 쓰고, 감정 곡선이 최저점에 있어 침울할 때는 쓸 기력이 없어 글을 못 쓴다.


 최근에 내가 글을 못 쓴 이유는 후자였다. 뒤엉킨 생각과 감정들이 끝도 없이 날 괴롭히는데 그 어떤 처치를 할 수 없는 감당불가 상태였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선택한 발버둥은 극장에서 영화관람하기였다.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를 범죄도시 2로 기억할 정도니 개인적으로 오랜만에 찾은 극장이었다.






 이번 영화 관람의 제1 목적은 단 2시간 만이라도 '무거운 머릿속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만들기' 였기에 내가 봐야 할 영화는 반드시 킬링타임용이어야만 했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 끝에 예매한 영화는 밀수였다. 극장에 일찍 도착해 상영관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밀수를 만든 사람이 류승완 감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믿고 보는 배우들(김혜수, 염정아, 박정민)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만으로 기대가 컸는데, 류승완이라는 이름 석자에 영화적 재미는 이미 확보됐구나 하는 안심이 들었다.



 해녀들이 밀수에 가담한다는 설정은 신선했고, 악당(?)들을 바닷속에서 맨손으로 처리하는 해녀들의 수중액션신은 통쾌했으며, 역할 분담이 착착 된 그녀들의 연대는 든든하고 유쾌했다. 단순한 플롯에 배우들의 능청맞은 연기가 잘 어우러진 덕에 영화를 보는 내내 소기의 목적(궁서체 머리를 흘림체 머리로 만들기)을 달성할 수 있었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나서 한 노래를 알게 되어 줄기차게 흥얼거리고 있는데 바로 최헌의 앵두라는 곡이다. 노래가사가 주인공의 상황뿐 아니라 내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입가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이야기 속에서 안타고니스트의 '배신'은 너무 흔해빠져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흡입력이기도 하다. 배신을 당한 쪽은, 믿음을 저버린 자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하기 마련이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건이 생기고 이야기의 국면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은 얼마나 가까이에 있고 또 빈번한가.

불륜, 일방적인 이별, 갑작스러운 해고, 채무자의 연락두절 등등 어쩔 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삶 전체가 나를 속여 내가 어디까지 노여워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배신은 슬프도록 친근한 소재라는 점에서 감정이입마저 쉽다.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마음을
흘러가는 구름은 아니겠지요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눈동자
구름 속의 태양은 아니겠지요
ㅡ 최헌, 앵두


 영화 속 주인공은 배신을 당한 이후에 이 노래를 조려서 몰랐는데, 가사를 곱씹을수록 너를 정말로 믿고 싶으니 제발 나의 믿음을 저버리지 말아 달라는 불안 섞인 애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배신을 당했을 때 겉으로 드러나는 1차 반응은 좌절과 분노다. 이에 영향받은 와신상담과 절치부심 모드가 (아주 가끔 잘 풀리면)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의 신의가 하찮게 취급되었다는 모멸의 경험은 끝내 마음속 깊은 곳을 찌그러뜨린다.

 사람에게 내어 줄 마음을 반의 반의 반으로 접게 하고, 다시는 속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사람을 바라볼 때 의심의 눈동자를 치켜뜨게 만든다. 본래 사람을 잘 믿고, 믿고 싶었던 한 때의 마음이 건드려진 것인지 노래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절절히 와닿는다. 노래와 달리 영화에서는 배신의 오해가 풀려 해피엔딩이 되는데 나는 이런 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을 (감독이 표방하는 장르와 별개로) "판타지"로 분류한다.


 배신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했던 극장 안에서의 안도감이 극장 밖 현실과의 격차를 더 크게 만든 것일까. 어두컴컴한 상영관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거짓말처럼 머리가 무거워지고 입이 쓰기 시작했다. 재밌게 영화 잘 보고 나와서 어러는 나도 참 병이지 싶다. (너 T야? 응 나 T야)


 극장 밖 현실의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삶과 배신에 대한 통찰이 개운했던 다른 영화의 대사를 떠올린다.


살면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대부분 뒤통수에서 오게 돼 있거든. 절대 눈앞에서 오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너도 자주 뒤돌아보면서 살아.

ㅡ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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