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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Aug 15. 2023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우리의 맨얼굴이 산다


 나는 여덟 살 이후로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다. 30여 년 전, 어린 시절 기억이 남아있는 저층의 작은 아파트는 아버지의 사업 자금 밑천이 되어줘야 했다. (엄마 말에 따르면) 그 뒤로 몇 번 아파트에 살 기회가 있었지만 잘못 선 빚보증, 사업 부도 위기 등으로 아파트 몇 채가 날아갔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아파트와 인연이 영 없었던 건지 아버지의 사업이 자리 잡고 난 이후에도 부모님과 함께 산 집의 형태가 아파트였던 적은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파트라는 낯선 공간에 대해 경계심과 호기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수도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파트 단지임에도 말이다.

 

 살기 너무 편하다며 아파트를 찬양하는 동생도 분가하고 얼마 안 됐을 때는 (작은 층간 소음에도 잠을 못 이루겠다고) 아파트 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나도 동생처럼 결혼으로 독립하길 바랐던 적이 있었는데, 삼십 대 중반의 이별 후유증은 생각보다 요란했고 이후 내 결혼의 행방은 점점 묘연해져 갔다. 나이 든 자식이 부모에게 빌붙어 살았을 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몸소 겪은 자로서 단언하자면 이건 (서로에게) 꽤 심각한 비극이다. 부모-자식 간 라이프스타일의 차이는 조화를 이루기 어렵고, 가족도 종국엔 다 타인에 불과하다는 차디찬 명제를 매 순간 깨닫는다.



 

 대내외적인 압박들로 나가고 말 거라는 결심만 수만 번, 그럼에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던 주 핑계는 돈이었고 다음은 아파트 살이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그럼에도 현재 나의 경제력, 아파트라는 자산의 환금성, 여자 홀로 살아야 하는 현실과 안전성을 모조리 고려하면 아파트가 답이었다. (특별한 이슈가 없다면) 나는 2년 뒤 가족과의 비극(?)을 종식시키고 내 생애 첫 집인 아파트에서 나 혼자 산다를 시작한다.




 미래 입주민으로서 아파트에 대해 선행학습한다는 마음으로 저번 주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봤다. 역시나 내 흥미를 잡아끈 설정은 온 세상을 쓸어버린 대지진이 아니라 그 와중에 건재한 황궁아파트라는 공간적 배경이었다.


 나는 평소에도 아파트를 볼 때마다 참 독특한 건물이란 생각을 많이 했었다.


구분'소유권'이란 것이 분명 존재하지만, 결국 공동구매한 수많은 가구가 쪼개 쓰는 형태의 주택.

집인 듯 내 집 아닌 내 집 같은 헷갈림을 주는데도, 등기라는 종이 위에 (소유자로) 이름 석자 올리기 어려운 가격이 깡패인 주택.

특정 지역에만 몰리는 수요의 폭발을 좁은 땅 덩어리라는 공급의 한계 속에서 풀어낸 최상의 주택.


 




 부녀회장 지휘하에 다 같이 모여 대책을 세우고, 주민대표를 일사천리로 뽑은 다음, 외부인 몰아내기에 대한 투표와 그 결과를 단행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아파트란 주거공동체의 거침없음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생존을 향한 인간의 적응력은 늘 감탄을 자아내지만 극한 상황에서 한 배를 탄 여럿이 뭉치니 현실적 생활력이란 것이 한층 더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향한 공동의 합의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모여있다는 건 그 사실만으로 어마무시한 균열의 잠재력을 내포한다. 인간의 욕망과 욕망이 충돌했을 때의 파괴력은 지진의 그것 못지않다. 파멸로 가는 행태와 강도로 보면 자연재해인 지진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공포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매력은 천편일률적으로 생긴 아파트 안에서 천차만별의 캐릭터가 살아 숨 쉰다는 것에 있다. 심지어 아파트는 개인적인 삶의 공간이다. 밖에서 제 아무리 그럴듯한 가면을 뒤집어쓴다 한들 그걸 집에서까지 쓰고 있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그래서 이 영화는 눈을 반만 뜨고 봐도 맨얼굴을 드러내는 인간의 천태만상이 너무 선명하게 보인다.



세상이 폐허가 된 마당에도 자가와 전세를 구분 짓기 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아파트 입주민들에게는) 지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고 욕먹으면서 외부인이랑 먹을 것과 잘 곳을 나누는 인간이 있고, 변화한 현실에 대한 빠른 판단과 적응으로 기민하게 살아남는 인간이 있으면, 극으로 치닫는 집단 이기주의를 두려워하고 염려하며 바라보는 인간도 있다. 지킬 대상이 너무도 분명해서 오직 그것만이 기준이 되는 인간이 있으면, 모든 걸 다 잃고 지킬 게 없을 때의 광기가 어디까지 뻗쳐 나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인간도 있다.


 어떤 이야기든 인물이 여러 명 등장하면 그중 하나에 나를 투영시켜 몰입하곤 했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인물 여기저기서 수많은 내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나와 내 가족의 생존이 위협받고 오늘과 내일을 가늠할 수 없는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나라면 어땠을까? 이건 선하고 저건 악하다고 단언할 수 있었을까? 너는 틀리고 나는 맞다는 확신이 가능했을까?

영화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경계에 관객을 몰아세우고 끊임없이 질문을 내던진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이고, 나와 남의 삶을 대하는 '인간적인' 선택이란 과연 무엇인가?


 입주도 하기 전에 너무 콘크리트 디스토피아에 심취했나 싶긴 하지만, 섬뜩한 분위기와 스산한 스토리 그 안에 담긴 근원적인 질문들은  취향의 코어만을 저격했다.





영화를 다 보고 극장 밖으로 나왔더니 이미 밤이었다. 송도 신도시의 수많은 아파트가 자아내는 불빛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집으로 운전하며 오는 길에 마주한 풍경의 8할 또한 즐비한 아파트들이었다.


 내 미래의 아파트는 아직까지 평당 얼마의 무슨 브랜드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분양권 계약서로 실재하고 있.  공간이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가 될지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가 될지는 살아봐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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