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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Sep 09. 2023

파란 바다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라울 뒤피 전시, 색채의 전율


주말에 미술관에 가면 그림을 보러 간 건지 그림을 보러 온 사람들을 보러 간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그래서 미술관에 갈 때는 평일에 연차를 내고 가는 습관이 생겼다. 관람 티켓은 미리 사뒀었는데 가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주 전시가 끝난다는 말에 부랴부랴 라울 뒤피전시를 목요일 한낮에 보고 왔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을 찾은 건 뭉크 전시회 관람 이후 약 10년 만이었다. 9월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날이 좋아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인천사람인 내가 연차를 쓰고 서울까지 간 거니 여행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오후 2시 도슨트 일정에 딱 맞춰 도착했는데 입구부터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번 라울 뒤피 전시는 신기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두 곳에서 열렸다. 하나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하나는 더 현대에서 열렸는데 우연의 일치였다고 한다. 두 곳 다 가고 싶긴 했는데 어차피 볼 그림이라면 백화점보다는 미술관에서 보고 싶단 생각에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전시를 선택했다. 라울 뒤피라는 화가에 대해 이름 말고 아는 바가 없었던 나에게 결과적으로 더 좋았던 선택이었던 것 같다. 한가람 미술관 전시는 라울 뒤피의 회화 외에 그의 장식 예술도 접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1. 항구도시에서 태어나 바다를 사랑한 화가


 프랑스의 노르망디 항구도시 르아브르에서 태어난 라울 뒤피는 유년기에 자신을 키운 것이 바다라고 할 만큼 그의 인생에 바다가 주요한 키워드였다. 실제 그는 바다를 많이 그렸는데 이 전시의 마지막 섹션에서 라울 뒤피의 바다 그림을 중점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도슨트 님의 설명에 따르면 라울 뒤피는 패턴에 능했다고 한다. 그의 개성 있고 아름다운 패턴은 패션과 직물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바다 그림을 보다 보면 그리스 알파벳 람다 Λ 모양의 패턴이 반복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다의 파도를 표현한 것이었다.


파란색을 그 어떤 화가보다도 사랑했다는 그는 "푸른색은 모든 단계예서 고유의 개성을 간직한 유일한 색이다. 가장 짙은 색부터 옅은 색까지 명암이 달라도 늘 푸른색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라울 뒤피의 바다 그림에서 그가 표현한 파란색을 보다 보면 실제 바다 앞에 있는 듯한 청량감이 느껴진다. 어떤 대상을 몹시 사랑하는 사람의 표현력은 적당히 좋아하는 사람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파란색과 바다를 사랑한다면 라울 뒤피의 바다 그림을 감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색채의 전율을 눈과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 패션에서도 볼 수 있는 라울 뒤피의 패턴과 색채 감각


그림을 보러 갔는데 의상까지 볼 수 있는 전시회가 흔할까. 다양한 분야의 예술 세계를 갖고 있었던 라울 뒤피의 전시회에선 가능하다. 실제 생활에서 직물과 패션이 그림보다 친숙하기 때문인지 이 섹션에서 그가 패턴과 색채를 잘 구사하는 화가라는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패션에 관심 많은 일반 여성으로서 그의 패턴이 가미된 작품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예쁘다, 사고 싶다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 오트 쿠튀르의 유명 디자이너 폴 푸아레와 협업한 의상들을 보면서 (마네킹과 같은 옷 다른 느낌일지언정) 그저 나도 입고 싶다는 생각만 하였다.



이 또한 나이 든다는 증거인건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꽃에 눈을 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라울 뒤피가 표현하는 꽃(특히 장미)이 무척 아름답다.


3. 모방의 천재에서 자기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 화가 라울 뒤피


도슨트의 첫 설명은 라울 뒤피가 여러 미술 사조와 다양한 화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프랑스의 큐레이터가 전시관 첫 섹션에 초상화 여러 점을 배치한 것도 그걸 한 번에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전시 설명 내내 도슨트 님이 라울 뒤피의 그림에 영향을 끼친 화가들과 그 그림들을 비교해서 보여주셨다. 놀랍게도 그에게 영향을 끼친 화가들이 전부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반 고흐, 앙리 마티스, 폴 세잔)이었다.


나는 빛과 그림자, 강렬한 색채가 담긴 그림에 주로 마음을 뺏긴다.

그런 그림들 앞에 서면 내 안에 있는지 조차 몰랐던 감정들, 내가 숨겨놓은 에너지들이 이제 그만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라울 뒤피의 그림 앞에서도 그런 꿈틀거림을 몇 번 느꼈다.



도슨트 님이 라울 뒤피를 모방의 천재라고 표현했을 때 예전의 나라면 그를 예술가로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한가부터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창작과 예술에 있어 어디서 본듯한 느낌과 짜깁기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발견되면 경기를 일으키며 폄하했고, 모방은 곧 삼류를 자처하는 지름길이라는 도식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진실을 너무 이해하고 있다. 되려 모방을 통한 오랜 연습과 숱한 영향 속에서 끝내 자기만의 인장을 뚜렷하게 찍은 작품과 예술가에게서 천재성을 발견한다. 자기 이름을 걸고 고유의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의 태도로 내가 본받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당신은 태양을 모방해서는 안 되며, 당신 자신을 태양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세잔의 선언을 진정으로 이해한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는 라울 뒤피. 뒤피가 빛이라고 부르는 빛은 태양이 아닌 색상 자체에서 발산되는 빛을 뜻했다고 한다.


화가가 자신만의 색채를 발견할 때뿐 아니라, 인간이 삶에서 자신만의 색채를 발견할 때 또한 기억해야 할 선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에서 오래 활동을 하셨던 도슨트 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인상 깊은 내용이 하나 있었다.  코로나 이후 프랑스에서 유독 라울 뒤피 전시회가 많이 열렸는데, 삶을 긍정하는 그의 태도와 행복을 느끼게 하는 그의 그림이 코로나로 인해 힘든 프랑스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위로를 되길 바라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삶은 항상 나에게 미소 짓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인생에 늘 웃음을 지어 보였다.
-라울 뒤피


수양이 덜 된 나는 삶이 미소 짓지 않으면 여느 때처럼 꺼이꺼이 울고 말겠지만, 앞으로 울다 지쳐 미소 비슷 무리한 것이라도 짓고 싶을  라울 뒤피의 그림을  찾게 될 것 같다.  



이십여 년 전, 말 그대로 배낭 하나 들쳐 매고 한 달간 떠났던 유럽여행.

그 마지막 장소가 파리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삶이 미소만 지어준다고 착각했던 걸까. 에펠탑 야경은 그리도 열정적으로 가서 봐놓고 거기서 가까운 곳에 있다는 라울 뒤피 전기의 요정은 왜 보고 올 생각조차 못했을까. 심각하게 파리행을 고민한다. 세상은 넓고, 가야 할 곳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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