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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l 01. 2024

일상을 비우고, 자연으로 채우다

완주, 아원고택 방문기


불과 저번 주,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였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저녁 8시가 다 되어도 해가 지지 않는다. 어제 해가 질 무렵, 나는 고속도로 위에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일몰이 자아낸 연보랏빛 하늘을 바라보며, 오직 자연만이 만들 수 있는 색의 조합과  그러데이션에 감격했다.

대개 도시에서의 풍경은 부자연스러운 것들로 가득 차있다. 사람과 차들로 뒤엉킨 건물 사이에서 몸은 부대끼기 일쑤고, 소리보다는 소음에 가까운 음파는 귀를 따갑게 한다. 나는 이제야 어르신들이 왜 그렇게 산과 들, 바다로 나가시는 건지  꽃과 나무가 주는 기쁨을 왜 그리도 사진에 담아두려 하시는지 그 이유를 깨닫는다.


어느덧 한 해의 반을 달려온 지금, 실제로 숨이 턱턱 막히고 만사가 지겨워졌다. 관계 속 긴장은 너무도 피로하고, 인공의 화려함에 반응하는 도파민도 턱끝까지 찼다. 이럴 땐 자연 속에서 덜어내고 비워내는 것이 시급하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 익숙한 듯 낯선 곳이 어디 있을까 물색하다 완주를 떠올렸고 최종 목적지는 아원고택이었다. 외가인 전주와 가까운 곳이지만 완주에 가본 적은 없었다. 완주의 아원고택을 가기로 하고 나서 자연스레 엄마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엄마는 전주에 살고 계신 이모도 함께 가길 바라셨고, 엄마와 이모, 이모 딸인 사촌언니, 나를 포함한 넷의 여행이 즉흥적으로 성사되었다.



우리의 정원이란 뜻을 가졌다는 아원고택은 사방이 초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야가 확 트여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 몸과 마음이 무장해제되었다. 방에는 TV가 없어 공간 그 자체에 집중하기 좋았다.  평소에는 한 것도 없이 늘 시간에 쪼들렸는데, 실제로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많았음을 알게 되었다. 도심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던 개구리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마루에 대자로 누워 잠을 잤더니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인공적인 빛과 소음이 덜 하면 나도 푹 잘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원고택에서는 조식을 제공해 줬는데 눈뜨자마자 먹어도 부담 없는 메뉴들이 속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해 주었다.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년에 독립을 하면 나 스스로를 위해 이렇게 정갈한 아침 식사를 차려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침을 다 먹고 나니 직원 분이 만휴당에서 차를 내려주셨다. 었던 방에서의 풍경도 좋았지만 이곳에 앉아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다도에 대해 잘 모르고 평소에 차보다 커피를 즐겨 마셔도, 차를 내리고 마실 때의 무드는 언제나 좋다. 천천히 차를 음미하다 보면 차분한 자세에 없었던 여유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내려주신 차는 발효차라고 하셨는데, 녹차 특유의 쌉쌀한 맛이 덜해 입가심으로 주신 곶감을 곁들여 두 잔이나 마셨다.



탁자 위에 놓인 싱잉볼을 두들기며, 차를 내려주신 직원분과 담소를 나누었다. 아원고택을 검색하면 몇 년 전 BTS가 휴가를 보낸 곳이라고 나오는데, 나는 배우 송강호 님이 영화 관상의 대본을 습득하기 위해 한 달간 머무셨단 사실이 더 흥미로웠다. 그 열정의 자취를 조금이라도 따라가고픈 마음에 어디서 묶으셨는지 여쭤봤는데 내가 머문 방이 있는 건물이었다. 별것도 아닌데 괜히 신이 났다.


하룻밤만 머물렀던 짧은 일정이었지만 아원고택을 나올 때의 나의 마음은 처음 도착했을 때의 것과는 달라져 있었다. 듬성듬성, 텅 빈 공간 사이사이에 내 안에 쌓여 있던 모든 안 좋은 기운들을 흘려보냈다.

뭐가 됐든 일단 다 비우자 하고 갔는데, 되려 건강하고 긍정적인 것들이 채워진 기분이었다.



완주를 떠나기 전, 아원고택 대표님의 또 다른 건물인 오스갤러리에 들렀다. 아원고택에서 못 본 차우차우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는 풍경도 아원고택 못지않았다. 갤러리 건물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산의 나무들이 물에 비춰 에메랄드 물빛을 뿜어내는데, 아원고택의 한옥과 달리 그 공간이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자연을 장악하는 것 없이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물, 그 아름다운 조화를 드러낸 것이 건축가의 철학이고 능력이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해 본다.  

 


 앞으로 속이 시끄럽고 어질 하면 당일치기로 다녀와도 좋을 곳을 발견한 것이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이었다.


한 가지 더 욕심을 내자면, 치매로 기억을 점점 잃어가는 이모에게도 조금은 천천히 잊힐 공간이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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